전체 글 (1372) 썸네일형 리스트형 김지명 - 우월한 사진사 맘대로 질주해도 접촉 사고 없는 내 눈은 후미등이 없다 보는 건 믿는 것 포충망 안에 잡힌 잠자리 모금함을 외면한 발길 나무가 수도승 같다는 말 뿌리가 짐승의 발굽 소리로 울며 자란다는 걸 알까 낙타의 짐이 점점 가벼워진다는 말 등에 실린 아픈 기억과 배후를 지워 털어 버린다는 걸 알까 보이는 것만 만지작거리는 눈이 그렇듯 씌어진 활자만 믿는 독서가 그렇듯 그 너머 새의 발은 구름계단을 오르는 즐거운 높이 가을은 숲길을 지우는 기다란 붓질 현실은 상상 속에 있다 내 몸이 떨렸던 것만이 현실 보바리 부인처럼 돈키호테 기사처럼 간혹 마들렌의 온기가 농담스레 전해지는 카페 냄새가 몸을 더듬어 노래가 시작되는 지점 코를 빌렸다 귀를 늘어놓았다 전조등으로 달리는 내 눈은 스쳐 가는 잔영으로 시끄러워 정거장을 모른.. 김지명 - 말할 수 없는 종려나무 발이 닿지 않아 이대로 얼어 버리겠어 북쪽 추위를 모르면서 점령군처럼 밀려왔나 창도 없이 방패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기척 하나 없던 봉쇄수도원 같아 깨진 종소리가 묵상하는 정원을 깨울 잘난 초록은 어디에도 없네 적막이 시계추처럼 태양을 굴리고 남쪽으로 길어지는 그림자가 먼저 수화를 건네는 흑안과 흑발의 나무들 사이 안녕?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속수무책 기도처럼 나 홀로 난민이에요 만져 보지 못한 내륙의 풀과 바위와 나무들이 영 모른다는 듯 선을 긋고 있어요 눈을 마주칠 때마다 팔과 다리를 오므려 어둠에 패인 내 추운 초록을 먹어버립니다 이파리의 집을 먹어 치운 애벌레처럼 깊은 잠에 들어도 눈이 열린다 밀물과 썰물에도 떠나지 않은 바다가 흘러와 어딨니? 데려가지 못한 지문들 부러져 떨어져 나간 발.. 김지명 - 나비 공화국 너무 많은 꽃들을 스쳐 왔다 들녘이거나 골짜기 어디쯤에서 만난 꽃들의 행방은 모르는 걸로 한다 길 건너 나비가 나를 복사한다 나를 훔쳐 간 눈동자 속 달콤한 입술 달래어 더듬거나 구름판 굴러 땅을 훑고 가는 활개 소리가 비구름의 행보에 나비잠 들 것이다 연두고 녹두 빛으로 빛날 때 둥근 생각으로 별과 달을 돌던 꽃과 나 사이 모난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바람이 물 위를 걸어와 요람을 펼치는 저녁 표정을 지운 표본실에 눕는다 봄여름 구겨 넣은 날개의 고정 핀이 위태롭다 장다리꽃 울타리를 고양이 울음 따라 넘었는데 외줄 거미 그네를 타고 맑은 하늘 흐르는 구름에 앉았는데 하수의 둔치에서 파닥거리던 행려의 명함 내 잔상을 건너온 당신을 인화한다 말투를 따라 하고 취향에 굳이 동의하고 후생으로 목걸이까지 목에 건 .. 김지명 - 쇼펜하우어 필경사 외 4편 (2013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 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별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바람은 아직도 짐승을 물어 나른다 마당 우리에는 삵 같은 너구리 같은 바람이 산다 덩치 큰 짐승들 울음소리 얼음장 밑으로 새어나가.. 김지명 - 사막 정원 모두 털려 그늘이 없다 죄를 양식하는 뒤는 모르는 걸로 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펄럭이며 노래하는 모래 언덕 건조대 위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 얼룩을 털고 있나 애인을 털리고 있나 모양이 다른 그림자는 모래알이 발성하는 뜨거운 전능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들려주는 뼈 시린 피리 소리를 알고도 눈감은 척 척을 버렸다 가벼워졌다 빈 가방이 무거워졌다 그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걸까 나는 성스럽게 투명한 투명한 반란에 갇혀 오래된 저녁까지 살기로 했다 비가 오면 사막은 증발해 버릴 거다 태양이 수거해 간 염문은 후렴이 사라질 거다 김지명 - 쇼펜하우어 필경사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 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젊음은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함부로 과녁을 팔지 않는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 댄다 절벽 한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 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되고 밤이 낮의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류근 - 세월 저편 (추억의 배후는 고단한 것 흘러간 안개도 불러 모으면 다시 상처가 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바라보는 것) 바람은 아무거나 흔들고 지나간다 여름 건너 하루해가 저물기 전에 염소 떼 몰고 오는 하늘 뒤로 희미한 낮달 소금 장수 맴돌다 가는 냇물 곁에서 오지 않는 미래의 정거장들을 그리워하였다 얼마나 먼 길을 길 끝에 부려두고 바람은 다시 신작로 끝으로 달려가는 것인지 만삭의 하늘이 능선 끝에 제 내부의 붉은 어둠을 쏟아내는 시간까지 나 한 번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그 먼 강의 배후까지를 의심하였다 의심할 때마다 계절이 바뀌어 그 이듬의 나뭇가지 젖은 손끝에 별들이 저무는 지평까지 나는 자라고 풍찬노숙의 세월을 따라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어디까지 흘러가면 아버지 없이 눈부신 저.. 류근 - 옛날 애인 이젠 서로 팔짱을 낄 일도 없고 술 먹다 눈 마주치면 그 눈빛 못 견뎌서 벽이나 모텔로 벌겋게 숨어들 일도 없고 심야택시 잡을 일도 없고 친구 생일 따위에 따라가 고깔모자 쓸 일도 없고 비 오는 날 우산 들고 기다릴 일도 없고 괜히 등산복 사 입고 산에 갈 일 없고 벅찬 오페라에 돈 쓸 일 없고 웃어줄 일 없고 편지 쓸 일 없고 꽃 이름 나무 이름 산 이름 골목 이름 하물며 당신 초등학교 단짝 이름 암기할 필요 없고 슬프고 아픈 척할 일 없고 군대 태권도 1단증 갖고 강한 척할 일 없고 미래에 대해 설명하거나 설득할 필요 없고 사랑한다 거듭 고백할 필요 없고 없으나 우리가 살아서 서로의 옛날이 되고 옛날의 사람이 되어서 결국 옛날 애인이 될 것을 그날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아내여, 이전 1 ··· 166 167 168 169 170 171 17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