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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 - 새로움의 건축학 새로움은 지칠 줄 모르는 무역풍에서 온다 동전을 넣으면 토끼를 낳았다 동전을 넣으면 소녀를 낳았다 철문 열리는 소리마다 하나씩 눈 깜빡 사이로 끼워 넣어 동전을 넣으면 후배를 낳았다 동전을 넣으면 스승을 낳았다 소낙비 지나간 뒤 해가 보이기 전 진하게 껴안기와 멀리 내쳐 버리기 새로움은 천장을 모르는 바람 새로움은 바닥을 모르는 바람 동전을 넣으면 말씀을 낳았다 동전을 넣으면 사랑을 낳았다 첫 만남의 말할 수 없는 어감을 익히기 전에 싱거워, 더 알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동전을 넣으면 동생을 낳았다 동전을 넣으면 나를 낳았다 피를 나눈 형제 이전 물을 나눈 형제로 꼬리잡기 놀이처럼 행진 잡히면 잘라 내고 행진 가는 봄이 가지 않고 오는 봄이 오지 않을 때까지 동전을 넣으면
김지명 - 발화 관솔 연필통이 내게로 왔다 언제나 흔적은 내가 뱉어 낸 어제로부터 온다고 수금하러 왔다 만지면 손금을 타고 혈류를 타고 감돌아 관계사를 모르겠어? 긴 낭하 끝에 자란 풀들은 기억의 모집단 싱싱한 풀잎만 골라내는 내 표본실에서는 옹이가 말을 건네듯 연결어미가 중요하지 달의 인력 같은 기억술이야 세월에 빚진 자들의 장서는 항시 마지막 장에 펼쳐져 있다 손대면 관솔 불빛이 내 지층 연안을 뒤적일 거 같아 독설로 쌓인 모래톱의 주름은 꽃으로 바꿀 수 없어 너는 미안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화난 비늘도 보이지 않은 채 미안으로 등을 만들고 둑을 만들어 사행천으로 흘러가 버렸어 달빛에 뒤척이는 은파로 말을 건넸지만 점점 멀어져 갔지 연흔이야 수많은 너는, 까먹은 네 발자국마다 화승총 냄새가 난다 가을이라는 풀무덤 ..
김지명 - 자물쇠 악보 허밍하는 숲아 재미 삼아 던진 음이름 하나 불러 줘 호수를 배반한 물고기는 울고 울어서 나무 위에 올라 산란하고 있어 바람아, 검은 구름 비질해 악어 장식 속에 뭔가 있다고 도둑을 불러와 뒤뜰 긴 의자에 마지막 연인으로 앉아 있는 내가 키운 편식의 보물 거친 키스로 까만 음자리표 걷어 줘 뭐라도 주고 싶은 정원으로 남아 있게 정물 같은 소녀는 혼자서도 당당할 때 사랑한다고? 첫 번째 거짓말처럼 우연으로 돌아와 포수 앞에서 발을 구겨 넣는 날개야 낮꿈의 꼬임에 발뒤꿈치를 데인 호기심아 나를 중얼거리다 달아나는 이름들 젖지 않을 우산 같은 표정들 보이니? 거부하는 후음으로 네가 꽃필 때 나는 검은 공터야 먼 곳의 너를 더 멀리 떠나간 너를 뒷북치며 따라가는 손은 하얘지고 있어 어딘가에서 늙어 갈 단 하나의 ..
김지명 - 물의 연보 물고기들이 꿈을 전시하고 있다 꼬리는 어디서나 묵행할 골목을 유영한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눈을 쌓은 나무는 얼음물 바른 봄 속으로 둥글게 걸어갈까 강안은 누군가 수없이 던진 말을 챙기느라 구불구불 그 아름다움에 유속 빠른 기분이 파고든 왕버들이 떠나간 자리 자동차 바퀴에 순해진 검은 길 같다 어지럽게 갈라진 우리의 손금을 떠난 촛불이 방생의 물길을 나서는 것은 멀어질수록 좋은 기억 때문일까 물고기가 물 건너간 소문은 온 세상 과녁에 몰두하고 화살 없이도 조용히 녹조가 부글부글 죽음에 전념한다 흐르는 강물이 흐르지 못하듯 흐르는 것은 빗방울을 만나 분연히 일어서고픈 이유이다 귀를 닫아도 들리는 수억만 년 전의 물보라의 선율 우리의 몸속 물고기에게 빚을 독촉하는 햇빛은 짱짱하다 물 안팎 시체의 향수가 끄는 ..
김지명 - 화장술 사마귀가 사는 눈썹을 풀섶이라고 읽는다 풀 비린내가 났다 당신은 홑눈을 굴려 식탁을 차리고 그림자 하나를 구부렸다 편다 사마귀는 적막을 풀어 미사를 집전한다 무더위가 쓰러져 풀잎에 누워 있다 식사를 마친 메뚜기의 뒤통수를 당겨 눈알에 번진 도수를 높인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성처럼 말씀은 뒷전으로 흘러 공기로 흩어진다 새들이 빠져나간 공중이 귀를 닫는다 왼손이 오른손을 끌었다 내치는 놀이에 몰두한다 고개 돌려 길목의 배후를 핥고는 같은 의상을 차려입고 신의 각도로 엎드린 종족을 경계한다 어디서나 뒤는 오래 만질수록 그르치는 법 근엄한 손발 풀어 미사포를 덮친다 뒷걸음질로 달아나는 눈물이 증발한다 소풍 나간 바람 맛을 디저트로 씹는 오후 습도가 무섭도록 높은 것은 그 많은 뒤통수의 울음 때문이다 당신이 지상을..
김지명 - 서정적인 잠 거친 소식을 띄웁니다 마른 잠을 불쏘시개로 던지거나 젖은 잠을 물에 적시는 밤이 운영하는 가위질 소리를 전합니다 아스팔트 위를 기는 지렁이가 잘리고 구부러진 힘을 펴는 역사의 집착이 잘린 눈을 감으면 밤이 화차 부려 별똥별을 띄우고 밤이 수차 돌려 길을 떠나는 불길이 물길 되는 꿈길, 끊어져 토막잠이 표정을 결제하는 곳 달아난 말을 점검하느라 새벽의 발목이 없는 곳 게으른 잠을 주세요 아픔으로 살찐 말들이 이불을 어루만지며 오늘의 우울을 복기하고 기록함에 낯간지럽지 않게 달빛 소복한 일요일을 주세요 행복이 낙진처럼 떨어지는 기다란 문장으로 결핍이 충만한 마지막 만난 저녁 쪽으로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말라 가지 않도록 늑장 부리는 잠을 토막 치지 말아요 잘린 환절로 일가를 이루는 지렁이처럼 구부러진 힘이 ..
김지명 - 은목서 사람에게 눈멀어 마을 밖에 산다 목구멍에 점막이라도 생긴 것처럼 자꾸 헛기침했을 거다 봄이면 묵묵히 장미의 까다로운 발작을 들었을 거다 화난 주먹을 쥐기 전, 이파리는 파닥이는 웃음으로 저녁을 길렀다 냉장고 소리에 잠은 술래가 되어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밤은 머리 위에 물주머니를 쏟아 생각하는 문장을 지워버렸다 세월이 단풍 들어도 단풍 들지 못하는 추문으로 비가 내렸다 우체부 행낭을 보면 언니의 혀에 돋은 마른 이끼에 침이 돌았다 반만 그려진 비밀 이야기는 벽지로 번져 리시안셔스를 피워 내고 아팠던 얼룩은 화보처럼 식탁과 책상, 방바닥에 굴러다녔다 인기척에 문을 열면 자갈 혼자 비탈길을 내려갔다 소녀의 이름을 기도처럼 발음하면 숨찬 밤이 지나가고 마루에 눈이 내리고 천사의 눈썹 같은 눈이 쌓이고 그의 침..
김지명 - 아나토미 물결무늬 치마의 밑단 실이 풀려나가요 늘어졌다가 줄어들던 해진 신념의 길들이 흘러나와요 조각난 유리에 비친 빛깔들의 무질서처럼 광채 나는 무엇이다가 사라지는 악력에 덜미가 잡혔지요 밀물로 빨려 들던 모래알이다가 호루라기에 쫓겨 도주하는 뒷걸음이다가 어깨가 처진 푸념으로 살아나는 수거함 속 느린 화면처럼 지절지절 풀리는 매듭은 해안 깊숙한 만 같은 연민이라 말할까 사랑보다 온도가 조금 낮고 덜 비밀스러워 가까운 골목이 먼 골목을 잊을 때까지 빨강 파랑 감정의 색실이 낡을 때까지 뼈 없는 물살로 흘려보내요 파도처럼 움켜쥘 게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