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72) 썸네일형 리스트형 류근 - 좋은 아침 술에 취해 옛 애인들에게 까맣게 기억 끊긴 전화질을 해대고 나서 이튿날 쪼그려 앉아 회개하는 나에게 숙취의 혼잣말이 어깨를 두드리나니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와 기억나지 않는 섹스를 하고 기억나지 않는 여관에서 혼자 깨어난 아침보다 낫다 류근 - 휴가병 아버지는 위독했고 나는 군인이었다 북으로 행군 중일 때 갑자기 휴가증이 나와서 어리둥절 시외버스를 타고 애인 만나러 신림시장 순댓집에 가서 앉았다 가을이었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애인은 얼굴에 화장을 무섭게 하고서 내가 없는 사이에 저 혼자 간직한 일들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딱히 갈 곳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간과 허파와 순대를 골고루 섞었을 뿐 여관에 가서 또 술을 마셨고 나는 천천히 취했다 내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애인과의 섹스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애인은 그새 많은 것에 깊어진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그새 더 많은 것에 가벼워져 있는 나를 배에 태우고 울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더 먼 바다를 불러줬다 그러나 나는 맹세코 운 것이 아니었다 커튼 밖에서 .. 류근 - 가을이 왔다 가을이 왔다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왔다 하루는 내가 지붕 위에서 아직 붉게 달아오른 대못을 박고 있을 때 길 건너 은행나무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몇 잎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길에 오르고 아직 바람에 들지 못한 열매들은 지구에 집중된 중력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주의 가을이 지상에 다 모였으므로 내 흩어진 잔뼈들도 홀연 귀가를 생각했을까 문을 열고 저녁을 바라보면 갑자기 불안해져서 어느 등불 아래로든 호명되고 싶었다 이마가 붉어진 여자를 한번 바라보고 어떤 언어도 베풀지 않는 것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뜻 안경을 벗고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는 일이 그런대로 스스로에게 납득이 된다는 뜻 나는 식탁에서 검은 옛날의 소설을 다 읽고 또 옛날의 사람을 생각하고 오늘의 불안과 미래로 가는 단.. 류근 - 가죽나무 태풍 지나고 나자 하룻밤 사이에 잎사귀 다 잃고 가죽만 남은 가죽나무 한 그루 살아서 제 이름은 남겼으니 그거 참 다행한 나무 아닌가 내게도 아직 당신이 부를 이름은 남겨져 있다 류근 - 11월 퇴직이 두 달 남았다 나이테를 간직하지 못한 채 중심부터 썩어버린 나무처럼 갑자기 쓸모없어진 여생이 잎사귀를 뚝뚝 떨군다 류근 -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어머니는 시집간 누이 집에 간신히 얹혀살고 나는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산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는 살아 있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으려고 억지로 몸을 비트는 나무들에게 어째서 똑같은 이름이 붙여지는지 하루 종일 봉투를 붙이면 얼마나 돈이 생기는지 생활비를 받아오면서 나는 생활도 없이 살아 있는 내 집요한 욕망들에 대해 잠깐 의심하고 의심할 때마다 풍찬노숙의 개들은 시장 쪽으로 달려간다 식욕 없는 나는 술집으로 슬슬 걸어간다 나는 술에서 깨기 전에 잠부터 깨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이므로 내 안면방해의 주범은 언제나 햇살이거나 싸다고 싸다고 외치는 야채트럭 확성기 소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미.. 류근 - ( ) 놓여진 말들이 모두 붕붕거리며 허공에서 부대낀다 함부로 축제를 즐기던 밤은 지났다 그러므로 이제 잘 준비된 추락과 고통을 꿈꾸어야 할 때(라는 메모에 대해서) 그와 나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해엔 공교롭게도 마시아마라에서도 섬진강에서도 뉴욕에서도 소녀들과 염소들이 태어났다 기억할 순 없지만 꽃들과 물고기들과 몇 개의 은행들도 새롭게 생겨났을 것이다 기억할 수 없다는 것 아름답지 않은가 몇몇 밤들의 연애와 혼돈과 방황들 자주 기억 밖에 머무는 것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아름답다 누구의 것도 아닌 삶을 살아내기 위해 결국 자기 안에 무덤을 팠던 사내를 나는 기꺼이 동무 삼고 구름 끝까지 데려가 온몸을 씻겨주고 애무하고 새처럼 안는다 간결하게도, 그런데 그런 것에 의미를 찾는 자들에 의해서 우리가 만든 무덤.. 류근 -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아무리 폼을 잡아도 끝난 연애는 코미디다 헤어진 지 1주일 된 여자를 모텔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는 친구 이야기를 듣다가 창밖 이쪽에서 저쪽으로 마구 달려가다 멈춘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그걸 한번 잡아보겠다고 쫓아가다가 비둘기를 놓친 고양이도 참 코미디가 아닐 수 없고 그걸 한번 잡아보겠다고 쫓아다니다가 새 애인에게 맞아 코뼈 휘어진 너도 참 코미디가 아닐 수 없으나 마누라가 준 용돈으로 용돈 준 여자가 다른 남자랑 공항버스 타고 사라지는 뒷모습 보고 와서 그새 바뀐 전화번호 찾아 헤매고 있는 나의 순정에 대해 나는 어떠한 조소도 바칠 수가 없다 이전 1 ··· 167 168 169 170 171 17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