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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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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라 - 티니안에서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티니안에서. 강보라. 그해 여름 사이판 국제공항에 도착한 수혜와 나는 국제선 터미널 끝에 자리한 경비행기 탑승 대기실에서 우연히 두 명의 미국인 남자와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젊은 백인으로, 한 명은 노란빛이 도는 갈색 눈에 골격이 크고 오른쪽 팔이 온통 문신으로 뒤덮여있었다. 다른 한 명은 짧게 자른 잿빛 머리에 헐렁한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한쪽 귀에 십자가 모양 금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대기실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신호를 보냈다. 캐리어를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두 남자의 장난기 어린 눈빛에서 한계에 다다른 육식 동물의 허기가 느껴졌다. 대기실에 사람이라곤 우리 넷뿐이어서 수혜와 나는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 대화 중에 나는 조금 당황했는데 수혜가 굳이 ..
남현정 - 그때 나는 (2021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그때 나는. 남현정. 그때 나는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누군가 내 몸을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중심을 잃은 채 곧 절벽 아래로 떨어질 상태였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기에 앞서 나는 이 절벽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몸의 중심을 잃으면 나는 죽을 것이다. 저기 까마득한 바닥으로 퍽. 내 몸은 찢기고 터져서 형체를 잃고 말겠지. 그런 최후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침착하자. 천천히 한 발자국만.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될 것인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몸이 떨려왔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찢긴 육체뿐일 참혹한 미래. 그것은 공포였으므로 내 몸은 떨려왔고 절벽 위에서 떨려오는 몸을 어찌하지 못하는 이 상황 ..
운치규 - 제주, 애도 제주, 애도. 윤치규. 그러니까 빙의가 될 거라고 했다. 무당이 바다에 빠져 죽은 넋을 건져 올릴 거라고. 정확히는 무당이 아니라 심방이었다. 제주도에서는 무당을 심방이라고 불렀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내가 아는 양 차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굿을 한다니. 그것도 아는 사람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위해 제사를 올린다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주도의 밤이 푸른 이유는 어둠 속에 귀신이 섞여서 그런 거야." 바다 위에는 아주 작은 불빛도 떠 있지 않았다. 양 차장의 말과 정반대로 하늘은 어두웠고 바다는 그것보다 더 어두웠다. 아득히 먼 곳에서 파도만 끊임없이 밀려왔다. 파도는 내 발밑에서 잠시 반짝이다가 물거품이 ..
김화진 - 나주에 대하여 (2021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너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어리다, 였다. 어리구나. 한눈에 봐도 알 만큼 어리다. 매끄러운 볼과 초조한 눈에서, 붉은 손끝에서 알 수 있었다. 아직 빛이 죽지 않은 가방과 닳지 않은 로퍼에서 알아봤던 것 같기도 하다. 코트 역시 낡은 데 없이 깨끗했다. 정돈하는 습관, 깔끔한 성격. 이어 생각했다. 나와는 다르구나. 옷을 함부로 던져 놓고 신발을 험하게 신는 나와는, 너는 다르다. 너는 나와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네가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 작게 내쉬는 한숨 소리, 손끝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가끔 기지개를 켜는 너의 꼭 쥔 손끝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네가 놀랄 걸 알아서, 언제나 자리에서 너무 벌떡 일어서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너..
이소정 - 밸런스 게임 (2021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밸런스 게임. 이소정. 많은 일요일들을 지나왔다고 윤은 생각했다. 징검다리 같은 일요일들에는 아들과 그녀, 단둘뿐이었다. 심지어 택배기사도 찾아오지 않는 요일이라고 윤은 베란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생각했다. 곳곳의 구멍 뚫린 방충망 사이로 총알 같은 햇빛이 들어왔다. 지난여름 술 취한 남자가 화단을 넘어 우산의 물미로 방충망을 내리찍는 일이 있었다. 어떤 흔적들은 오래 두고 본다고 해서 그 공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장마가 시작되면 곳곳의 물 웅덩이에 모기들이 알을 깔 것이다. 그 전에 방충망부터 수리해야겠다고 윤은 마음먹었다. 오래된 아파트 일 층이었고, 6월이면 작약이 피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윤은 방충망을 열고 숱을 쳐낸 머리카락을 쏟았다. 아들 건희는 이제 사학년이 됐고 부쩍 키가 자랐다. 지..
양지예 - 나에게 (2021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나에게. 양지예. 아이들 과제를 채점하는 데 유독 소린의 시험지가 눈에 띄었다. 이름, 풀이 과정, 답까지 모두 분홍색 펜으로 적어놓았다. 계산 문제를 펜으로 푸는 아이는 흔치 않은데 거기다 분홍이었다. 내가 젊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옆자리 사회 선생은 나이 먹을수록 글씨 읽기가 힘들다며 손으로 쓰는 과제는 절대 내주지 않았다. 주관식 시험문제도 모두 단답형으로만 냈다. 문장 단위가 되면 채점이 해독 내지는 독해가 되어버려 고역이라고 했다. 글자 포인트 13 이상, 교사들도 알고 있는 그녀 숙제의 가장 중요한 준수사항이다. 소린의 자리는 교실 중앙 앞에서 두 번째로 교탁에 서면 눈에 가장 잘 띄는 위치다. 필기할 때면 소린은 미간을 계속 찌푸렸다 폈다 했다. 노트를 볼 때마다 주름이 패는 ..
지혜 - 볼트 (2018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볼트. 지혜. 공장은 산을 가로지르는 국도 근처에 있었다. 오래된 도로 끝에 터널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회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팔차선에서 사차선으로, 사차선에서 이차선으로 점점 좁아졌다. 이윽고 나타난 컴컴한 숲의 초입에는 인적 하나 없었다. 샛길에는 커다란 활엽수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입구에 놓인 표지판은 녹슨 귀퉁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아슬아슬했다. 얇은 철판 위에 급하게 갈겨쓴 것처럼 보이는 표지판의 글씨는 획과 굵기가 일정하지 않아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보였다.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삼촌의 말대로라면 여기 어디쯤 아니 바로 그곳에 공장이 있어야 했다. 주변에는 건물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
강석희 - 우따 (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우따. 강석희. 우따는 우따였다. 제임스 T 우드를 왜 우따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방과 후의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하다가 문득, 저 아이를 우따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까지가 내 기억의 전부다. 그날도 나는 언제나처럼 그를 우따라고 불렀다. 그의 집에서 비디오와 만화책을 보고, 함께 피자를 시켜 먹고, 마지막 조각 하나를 서로 먹겠다고 투닥거렸다. 그러니까, 지각의 현상학과 존재와 시간을 베고 누워 아기 같은 얼굴로 낮잠을 자던,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 줄기에 얼굴을 찡그리던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를 죽이려는 생각이 들어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따가 경찰차에 실려 떠난 지 정확히 1년이 지나자 그를 만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