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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있겠지 4월의 마지막 날을 위해 비가 내릴 수도 있겠지 4월의 마지막 날을 위해 천지에 꽃들이 한꺼번에 져버릴 수도 있겠지 사랑한 사람은 멀리서 고양이처럼 소리를 멈추고 나는 휘어진 무릎을 곧게 세워 꽃받침대로 쓸 수 있겠지 4월의 마지막 날을 위해 우산을 사면 조금씩 헤어진 애인이 다가와 어깨를 적시고 방금 마련한 음악으로 이별을 지워버릴 수도 있겠지 사는 것은 늘 지루한 혼잣말, 언제 우리의 고장난 구름은 지붕을 고쳐 쓸 수 있을 것인가 콘돔을 산 애인은 어떤 여관에서 흘러나올 것인가 4월의 마지막 날을 위해 비가 내리고 4월의 마지막 날을 위해 일찍 구겨진 엽서가 반송될 수도 있겠지 지구의 마지막 바퀴가 반 바퀴쯤 허공에 넋 놓고 천천히 걸렸다 넘어올 수도 있겠지 4월의 마지막 날을 위해 너를 죽여버리고 ..
류근 - 크리티컬 블루, 재즈학교 오늘 밤 나의 파티에 오시겠어요? 구름과 불과 장미로 빚은 술이 있고 푸른 벽 귀퉁이에서 얼마든지 기타와 마리화나를 청할 수도 있어요 불안은 천장에 매달아둔 등불처럼 밤과 우리들의 어깨를 어루만지겠지요 밀고자가 없다면 좀더 오랫동안 평화로울 수 있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요 때로 불면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새벽이 오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여자들은 아무 데서나 옷을 벗고 남자들은 탄식 위에 그것들을 가지런히 널어놓습니다 밤에도 새가 우는 때가 있는데 동쪽에서 온 젊은이들이 긴 사냥총을 쏘아 죽이는 것으로 우리들의 위선을 지켜주기도 하지요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머리 기르길 더 좋아하나요 연애를 못 잊는 사람들은 왜 이별을 더 많이 기억하나요 콘트라베이스는 이제 너무 늙어서 낙타처럼 걷습니다..
류근 - 나에게 주는 시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류근 - 뱀딸기의 효능 먹을 수 없는 것이 식탁에 놓여 있어서 몹시 아름다운 세월을 살았다. 가령 마지막 월급 받은 날 황학동 27번지에서 산 청동 촛대라든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소포로 보내온 접시 두 개에는 성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가끔은 내가 사랑하거나 나를 사랑하다 그만둬버린 여자들, 그들이 꺾어온 꽃들, 노란 숟가락, 편지칼, 슬프게도 한 열흘씩 집을 비우고 난 뒤에는 푸르른 곰팡이들이 피어 햇살의 경계를 핥고 있었다. 여명이었고, 고양이를 키워야겠다고 결심한, 여자의 혼잣말은 지금도 들릴 것 같다. 공포를 이야기하는 일은 너무나 단순한 일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당신은 나를 좀더 평화롭게 어루만지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나는 곧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서 사람들에게 더 슬퍼 보일 것이 두려워 그만 여기서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