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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영화로운 나날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댓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공연했다 심야 상영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을 헹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
류근 - 인월다방 태백에서 열흘 전에 왔다는 여자는 커피를 주문하고 영양에서 보름 전에 왔다는 여자는 쌍화차를 마신다 분명코 회갑을 어딘가 달력에 표시해두었을 나이 아가씨라 부르지 않으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무작정 한 주전자 커피를 다 마셔대는 사이에도 여자들의 표정은 점점 더 나쁜 쪽으로 시들어간다 아직도 장작난로가 검고 붉게 타는 동네 다방 한 켠 탁자 위에선 화투패가 돌아가고 못 견딘 스님 하나는 결국 술을 사러 나가고 별로 할 말이 남지 않은 초면의 사람들끼리 남아서 새로 뽑힌 대통령의 미래를 걱정한다 늘지 않는 아이들과 늘어가는 빈집들과 줄지 않는 빚 여자들은 빚, 이라는 낱말에 새롭게 치를 떨며 잔을 헹구고 쌍화차를 다시 주문한 뒤 착착착, 담뱃불을 붙인다 착착착, 화투패는 돌아가고 오도재에서 고장 난 차는 ..
류근 - 엽신 우산을 쓰고 극장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언젠가 황금의 등불을 내다 건 은행나무 아래서 그해의 가을비와 마주친 적 있습니다 당신은 빗방울보다 깊고 달콤한 눈빛을 반짝이며 오래된 정물처럼 멈춰 서 있었지요 나는 겁먹은 소년처럼 도무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말도 그 순간엔 빗소리보다 정직할 수 없을 거였습니다 다만 내 안에서 일제히 소리치는 금관악기들의 탄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아, 다행이다 거기쯤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그날 내린 비가 그해의 첫 가을비였는지 마지막 가을비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세상에 내리는 가을비를 다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가을날은 그저 내 상실의 나날들을 지나쳐 갔고 모든 비는 내 어두운 창에 내리다 그쳤을 뿐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잘 생겨나..
류근 - 축시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
류근 - 반가사유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뒷골목에 내리는 눈을 바라봐야지 옛날 영화의 제목과 먼 나라와 그때 빛나던 입술과 작은 떨림으로 길 잃던 밤들을 기억해야지 김 서린 창을 조금만 닦고 쓸쓸한 여자의 이름을 한 번 그려줘야지 저물지 않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난을 저주하는 일 따윈 하지 않으리 아주 쓸쓸한 여자의 술잔에 눈송이를 띄워주고 푸른 손등을 바라보리 여자는 조금 야위고 나는 조금씩 흩어져야지 흰 벽에 아직 남은 체온을 기대며 뒷골목을 바라봐야지 내리는 눈과 지워진 길들과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검은 칼자국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조금은 쓸쓸한 인생을 고백해야지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어서 슬펐던 날들을 기억해야지 쓸쓸함 아니고선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아주 쓸쓸한 여자의..
류근 - 김점선의 웃는 말 그림 판화 당신과 내가 얼굴에 입이 반. 그리고 또 눈이 나머지 반의 반인 세상으로 한세상 그렇게 어울려 기대어 버티어 건너갈 수 있으면 좋겠네 상처도 없고 그리움도 없고 약속도 없는 생애까지 파랗고 하얗고 노랗게 남김없이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네 저녁이었으면 좋겠네 또는 아무 때나 아침이 오고 내일이 와서 다음 생의 다음 날이었으면 좋겠네 사람아,
류근 - 시인들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일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 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류근 - 위험한 날 술꾼들에게 가장 위험한 날은 뭐 다 아시다시피 술맛이 물맛인 날이다 반드시 바닥에 누워 바닥을 본다 바람둥이에게 가장 위험한 날은 뭐 다 아시다시피 아무나 여자로 보이는 날, 이 아니다 여자가 다 아무나, 로 보이거나 여자가 오히려 나, 로 보이는 날이다 오늘 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위험한 날은 지구에서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끼룩끼룩 눈물겨워서 하느님도 되고 어머니도 되고 작부도 되고 정류장도 되고 애인도 되어서 그냥 다 두어두고 싶은 날 울다가 사람으로 그만 돌아가고 싶은 날 기러기 남쪽으로 가고 메추라기 북쪽으로 간 바로 다음 날 그다음 날 우주의 꽉 찬 빈틈이 보이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