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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반가사유

 

어떻게든 이별:류근 시집, 문학과지성사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류근 산문집, 해냄출판사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뒷골목에 내리는 눈을 바라봐야지

 옛날 영화의 제목과 먼 나라와 그때 빛나던 입술과

 작은 떨림으로 길 잃던 밤들을

 기억해야지

 

 김 서린 창을 조금만 닦고

 쓸쓸한 여자의 이름을 한 번 그려줘야지

 저물지 않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난을 저주하는 일 따윈 하지 않으리

 아주 쓸쓸한 여자의 술잔에 눈송이를 띄워주고

 푸른 손등을 바라보리

 여자는 조금 야위고

 나는 조금씩 흩어져야지

 흰 벽에 아직 남은 체온을 기대며 뒷골목을 바라봐야지

 내리는 눈과 지워진 길들과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검은 칼자국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조금은 쓸쓸한 인생을 고백해야지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어서 슬펐던 날들을

 기억해야지

 쓸쓸함 아니고선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아주 쓸쓸한 여자의 눈빛을

 

 한 번 오래도록 바라봐야지

 뒷골목 몹시 서성거린 내 눈빛

 누군가 쓸쓸히 바라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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