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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위험한 날

 

어떻게든 이별:류근 시집, 문학과지성사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류근 산문집, 해냄출판사

 

 

 술꾼들에게 가장 위험한 날은

 뭐 다 아시다시피

 술맛이 물맛인 날이다

 반드시 바닥에 누워 바닥을 본다

 

 바람둥이에게 가장 위험한 날은

 뭐 다 아시다시피

 아무나 여자로 보이는 날,

 이 아니다

 여자가 다 아무나, 로 보이거나

 여자가 오히려 나, 로 보이는 날이다

 

 오늘 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위험한 날은

 지구에서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끼룩끼룩 눈물겨워서

 하느님도 되고

 어머니도 되고

 작부도 되고

 정류장도 되고

 애인도 되어서 그냥 다 두어두고 싶은 날

 울다가 사람으로

 그만 돌아가고 싶은 날

 

 기러기 남쪽으로 가고

 메추라기 북쪽으로 간 바로 다음 날

 그다음 날

 

 우주의 꽉 찬 빈틈이 보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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