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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어떻게든 이별:류근 시집, 문학과지성사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류근 산문집, 해냄출판사

 

 

 어머니는 시집간 누이 집에 간신히 얹혀살고

 나는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산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는 살아 있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으려고 억지로 몸을 비트는 나무들에게

 어째서 똑같은 이름이 붙여지는지 하루 종일

 봉투를 붙이면 얼마나 돈이 생기는지

 생활비를 받아오면서 나는 생활도 없이 살아 있는

 내 집요한 욕망들에 대해 잠깐 의심하고

 의심할 때마다 풍찬노숙의 개들은 시장 쪽으로

 달려간다 식욕 없는 나는 술집으로 슬슬 걸어간다

 

 나는 술에서 깨기 전에 잠부터 깨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이므로

 내 안면방해의 주범은 언제나 햇살이거나 싸다고

 싸다고 외치는 야채트럭 확성기 소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정작 내가 미워하는 놈들은 따로 있는데

 그림 그리는 내 친구 후배가 지국장으로 있는 한겨레

 신문을 내가 보기도 전에 잽싸게 훔쳐가는

 308호나 408호에 사는 대학생 놈들

 밤도 새벽도 없이 술 취한 여자들을 끌고 들어와

 또 한바탕 술판이나 벌이는 그놈들과

 얼굴을 몇 번 마주쳤을 텐데도 내 기억에는

 술집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별로 다르지 않고

 그래서 쉽게 기억 안에서 놓쳐버리게 된다

 내 눈에는 모든 길이 술집으로만 이어져 있고

 맨정신일 때에는 외출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도 못하고 도대체 뭘 배웠냐? 내가 매달려

 사는 애인의 어머니는 내가 그 귀한 딸에게 매달려

 사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가끔씩 전화해서 기를 죽이곤 하는데 

 일본서 대학까지 마치고 온 이력에 비하면 형편없는

 전업주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내가 다닌 대학을

 얕잡아보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뭐 남들보다 몇 년

 더 학교 다니고도 취직 못 하는 내 처지도

 결코 내세울 만한 건 못 되기 때문에

 나는 전화벨 소리만 나면 죽은 시늉을 하게 된다

 취직을 하고 넥타이 매고 환속한 승려처럼

 양주 아니면 안 마시는 지조를 갖추면 그때는

 좀 크게 숨 쉬며 살 수 있을까?

 

 내가 일없이 취해서 날마다 취해서

 숙취와 악취를 지병처럼 앓고 살 때

 어머니는 햇살을 피해서 잠만 자꾸 주무시고

 그 바로 옆 벽 하나를 지나서

 매형과 누이는 자주 늦잠을 잔다 그러나

 들여다볼 수 없는 꿈 밖의 세월은

 한 걸음만 나서도 우리들에게 벼랑이라는 것을

 조카들만 빼놓고는 다들 알고 있다 알면서도

 눈 뜨고 잃어버린 집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또 누군가에게 빨리 들켜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절망하고 싶어진다 평화롭게

 항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 적군을 향해서

 나는 나의 순결한 백기를 흔들어야 하는가

 비틀거리며 돌아올 때마다 더 수직으로 빛나는

 세상이여 나는 왜 이렇게 너희와 다른가

 이렇게 닮지 않으려

 몸을 비틀어야만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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