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372)
최인호 - 캉캉 외 5편 (201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발목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불란서 댄서들은 하이힐에 올라야 비로소 태어나지 발끝을 모으지 분란은 구두 속에도 있고 탁아소에도 있고 어쩌면 내리는 눈의 결정 속에서도 자라고 오후 세시에는 캉캉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려면 쓸데없는 말들이 필요해요 식탁 아래서 발을 흔들고 유쾌해졌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래 휘파람 부는 것 같아서 뉴스를 튼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가십을 만들죠 상반신만 보이는 아나운서의 팔을 믿으며 캉캉은 감춰지는 중 양말 속에 주머니 속에 불란서 댄서들의 스포티한 팬티 속에 빨간 주름치마가 되어 덤블링이 되어 지구가 돌아간다 구세군 냄비에 눈이 쌓이고 내년에는 내년의 근심이 기다리겠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제왕절개 했습니다 답하겠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
김동균 - 우유를 따르는 사람 외 4편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름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게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 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던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
박은영 - 발코니의 시간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 있을 당시 이미 겪어 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 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 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
조온윤 -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2019 문화일보 신춘문예)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그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 강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가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그 시선의 수심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심해어의 눈처럼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보고 있겠지만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이 없어도 자전하는 지구본처럼 물고기의 눈알이 빨간 국물에 적셔졌다면, 지금쯤 식탁 위에서 눈알을 도려냈다..
차유오 - 침투 외 5편 (2020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물속에 잠겨 있을 때는 숨만 생각한다 커다란 바위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바닥으로 물이 들어온다 나는 서서히 빠져나가는 물의 모양을 떠올리고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을 잡게 된다 물결은 아이의 울음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가지 못한 곳까지 흘러가면서 하얀 파동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고 나는 떠오르는 기포가 되어 물 위로 올라간다 숨을 버리고 나면 가빠지는 호흡이 생겨난다 무거워진 공기는 온몸에 달라붙다가 흩어져버린다 물속은 울어도 들키지 않는 곳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지워준다 계속해서 투명해지는 기억들 이곳에는 내가 잠길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있다 버린 숨이 입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하얀 침대가 있다 눈을 뜨면 병을 찾아내는 의사가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죽어가는 것 같다 식..
문혜연 - 당신의 당신 외 5편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 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
이린아 - 돌의 문서 외 5편 (2018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서게 될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음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 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
조윤진 - 새살 외 5편 (2018 한국경제 신춘문예) 입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 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 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