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
물속에 잠겨 있을 때는 숨만 생각한다
커다란 바위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바닥으로 물이 들어온다
나는 서서히 빠져나가는 물의 모양을
떠올리고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을 잡게 된다
물결은 아이의 울음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가지 못한 곳까지 흘러가면서
하얀 파동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고
나는 떠오르는 기포가 되어
물 위로 올라간다
숨을 버리고 나면
가빠지는 호흡이 생겨난다
무거워진 공기는 온몸에 달라붙다가
흩어져버린다
물속은 울어도 들키지 않는 곳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지워준다
계속해서 투명해지는 기억들
이곳에는 내가 잠길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있다
버린 숨이 입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빛>
하얀 침대가 있다
눈을 뜨면 병을 찾아내는 의사가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죽어가는 것 같다
식물은 물과 햇빛을 먹으면서 자라났다
병은 그렇게 자라났을 것이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병실로 들어오고
누워 있는 사람들은 내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오면
그 사람을 알 것 같아서
음악을 들었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면 얼굴이 비쳤다
깨진 거울을 보는 것처럼
계속해서 바라보면
빛이 빠져나갔다
얼굴은 사라졌다
먼 곳으로
빛을 따라가면 병원 밖이다
돌아누워서 커튼을 바라봤다
돌아설수록 커지는 것이 있고
내내 누워 있는 법을 알고 있었다
<숨바꼭질>
그네를 타면 따라서 흔들리는 네가 있다
모래 위로
우리의 그림자가 번갈아 가면서 흔들린다
나는 그림자가 태어나는 게 신기해서
모래 위로 떨어져 버린다
모래 위에 버려진 발자국을 신어보면
내가 더 깊어진다
끝인 줄 알았는데
둘이서 하는 숨바꼭질은 재미없잖아
술래는 숨은 사람만
생각해야 해
숨은 사람은 술래만
생각해야 해
모래가 부드러워서 누우면
옷이 더러워진다고 화내는
네가 있고
옷을 걱정하는 게 싫어서
털면 된다고 변명을 하는
내가 있다
우리는 또다시 숨어버리고
너에게는 한 명만 잡아가는
엄마가 있다
<풍선>
숨을 쉬는 것처럼 공기를 뱉어버린다
숨을 받아먹은 풍선은 점점 커지다가
나보다 커져버린다
풍선을 불 때마다
어항 속에 살던 금붕어를 생각한다
수면 위로 떠오른 금붕어를
엄마는 금붕어를 변기에 내려버렸고
어린 나는 눈을 감고 울음을 터트렸다
기포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너는
죽음도 쉽게 잊어버릴까
아가미를 벌린 금붕어를 생각하다가
부풀어 오른 풍선이 터져버렸다
그것들이 모두 숨이 될 거라고 믿었다
누군가 태어날 것 같다
<마르지 않는 얼굴>
사람들이 우산 속으로 숨자 비가 내린다
몸에 안착하지 못한 물방울들이 모여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밟을 때마다 살아 있다고 소리를 낸다
바람이 뒤집어 놓고 간 우산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우산을 버린 사람들은 도망가고 있는데
우산 손잡이를 돌리면 흔들리는 풍경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물방울이 떠나가고
어느새 비는 사람들의 등 뒤에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익사했다는 친구의 얼굴이었다
마르지 않는 친구의 얼굴을 잊고 싶었다
파래진 입술에는 어떤 말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울어버리고
젖지 않은 날들이 많았는데
축축한 날들을 더 오래 기억했다
온몸이 젖어도 친구를 만날 수 없고
신발 속에 숨어 있던 물방울이 젖은 양말을 데려가고
축축한 것들은 버려지고 나서야 말라갔다
젖은 몸을 털자 비가 그쳤다
모든 풍경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모두 잠들어 있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졸면서
고개를 흔들고 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 같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르는 사람들과 익숙해진다
나와 나눈 것도 없는데
<모두 잠들어 있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졸면서
고개를 흔들고 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 같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르는 사람들과 익숙해진다
나와 나눈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문밖으로 흘러나간다
다른 곳에서 내리면서
왜 같은 곳에 앉아 있는 걸까
남겨진 사람만이 떠나간 사람을 생각할 수 있고
아무도 보지 않는 창문 위로 낮은 지붕들이 떠다닌다
저 안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얼굴도 없는 사람들은 건너편이 된다
사람들은 나의 국적을 묻다가
여행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말해준 곳은 내가 가지 않는 곳
영원히 그곳에 갈 수 없을 것이다
기차가 속도를 높일 때마다 몸이 흔들리고
나는 처음 흔들려 본 것처럼 놀라게 된다
철길 위를 걸어다니면
또 다른 발이 생겨나고
철길 위로 뛰어든 사람들은 철길이 되었을까
돌이 되었을까
걸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솟아오른다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당선 소감>
시를 쓸 때 떠오르는 대로 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의미를 담아 읽어 준다. 시를 읽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고 쓸 것이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는 건 마음 같다. 가끔은 잊을 때가 있지만,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다. 세상에는 숨겨져 있어 아름다운 게 있다. 나는 그것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심사평>
침투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신인다운 신선함이 눈길을 끌었다. 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자의 내면과 물속이라는 공간에 대한 미시적이고도 섬세한 묘사가 돋보였다. 이 시는 빈약한 숨통에 존재의 모든 것을 기대야 하는 물속의 상황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몸으로 침투하는 물의 압력과 숨 막힘, 밀폐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이라도 잡아야 하는 치명적인 막막함을 냉정하게 관찰하는데, 그 시선에서 일상적 자아와는 다른 존재를 발견하고 사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친숙한 물 밖의 세계와 다른 시공간인 물속은 화자를 저항할 수 없는 숨 막힘으로 압박하는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동시에 울어도 들키지 않고 슬픔조차 무화되는 완전한 고독이 있는 매혹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익사할 것 같은 공포와 숨을 버려서 완전하게 혼자가 되는 자유가 교차하는 심리의 이중성이 시에 독특한 에너지를 부여한다. 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물 밖에서 밀실이라고 할 수 있는 물속으로 가려고 하면서도 벗어나려는 심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시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은밀하게 엿보게 한다. 물속 이미지와 움직임을 통해 내면을 탐색하는 탁월한 능력은 앞으로 더 큰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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