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살>
입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 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 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하이픈>
네가 도둑질을 할 때 나는 웃었지 너는 참 너답다 그게 바로 나의 취향이거든 바닥이 닿지 않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흥얼거리지 말고 걷자 네 취향이 나였으면 해
목이 부어서 아- 하는 소리를 내도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대
네 등만 보며 걸었다
이 리듬이 우리를 나아가게 해
너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춤출 줄 알아
건설적인 일은 되도록 하지 말자 무너뜨려도 다시 짓는 사람들이 많아 너와 어울리는 일은
가진 것 없이 웃는 법 우리는 모르지 달걀을 손에 쥐고 바위에 내려치는 일 있는 얘기도 없어 보이게 하는 일 반쯤 벗겨진 양말을 신고 돌아다니는 일 삶에 실려 가는
지뢰를 찾으면 죽는데도 지뢰 찾기라고 부르는 이유
너는 내게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아 절대 떨어질 리 없는 난간 위에서 난- 간- 이라고 발음하자 눈이 시리도록 서로를 응시하자 둘 중 하나는 말라비틀어지자
목이 부어서 아- 하는 소리를 내도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네
나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재미있는 얘기를 재미없게 잠을 자기 위해서는 꼭 집까지 가지 나는 도둑질을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은 머릿속으로 불러들인 적 없다
우리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어 - 원래 죽은 사람처럼 말하기
<아가미>
나 사실,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았어요
모르는 척했지만 앉아 있는 당신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내내
조그맣게 들썩이던 어깨, 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지던 비늘들
처음 마주하는 이목구비를 익숙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그 밤, 버스는 나와 나를 태우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앉고, 되돌아오는 길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떨어져 나갔지
어느 것도 깨트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눈 깜빡이지 않으려 연습했다 감아지지 않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을 머금어도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물고기의 눈동자가 내게는 있지
나는 멀쩡히 살아남았어요
잃을수록 빨라지는 곳
돌아가는 길 없이도 나는 버려지지 않았다 뭉툭한 몸체로는 물살을 가르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당신, 잃어버린 살갗을 떠올리면 어쩐지 시려 오는
당연한 것들이 사라진 자리는 곧 잊고 싶어질 거예요
물에 던져져 펄떡이던 심장
물이 차 가쁘던 폐가 나에게도 있었지
<블루 크리스마스>
이 거리에는 커다란 산타 동상이 하나 있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도 그곳에 다다르게 될 거야
가끔 서로를 모르는 척했다
우리 눈썹을 찡그리는 방식이 달라서
각자의 눈물 맛을 구별할 줄 몰라서
빈집에 당신을 혼자 남겨 두고 나오자
오른쪽과 왼쪽의 리듬을 잃어버렸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빛
입김은 공간을 흐려지게 만든다
가득 채워질 수 있다
산타가 우리의 몫을 들고 있을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 마음을
스노우볼이 깨진 자리
가루눈만 남아 반짝거렸다
그때부터 날카로운 조각을 손에 쥐고
이곳에 갇혀 있어
우리는 선물을 받지 못할 거야
새로운 길은 보이지 않고
조용히 쓰러지는 거대한 트리를 추모한다
걷는다 엇박으로
절대 녹지 않는 눈을 맞으며
<실크스크린>
겨울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들,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 당신과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그날, 커피숍에 마주 앉아 손을 꼭 붙들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어 화사한 표정으로 꽃다발, 아기자기한 모양의 볼펜, 붉은 낙엽, 김이 오르는 코코아, 그런 것들
그때 나는 초록 브로콜리, 빛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바다, 날이 선 종이의 모서리,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목성을 떠올렸지
맞아, 나의 음각, 당신의 뒷면
커피숍에서 일어나 우리는 그대로 손을 잡고 고작해야 벤치 두세 개가 놓여 있는 작은 공원을 걸었다
눈을 감은 채로 몇 발자국이나 뗄 수 있을지 궁금해졌지 당신은 발밑을 봐 줄 테니 내게 눈을 가고 걸어 보라고 했어 여섯, 일곱 걸음쯤 옮겼을 때
내 손을 덮고 있는
당신 손만이 이 세계에 남아 있었다
책임질 수 없던 시간들이 지나갔지만
그날 만났던 세계는 좀처럼 아득해지지 않고
사라져 버린 당신을 다시 만난 건 겨울이 다 지난 후였지
나의 깊은 바다 속을 거닐던 당신을 보게 되었을 때
겨울 내내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당신 손을 이제는 내가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손목에 손을 맞추자 비로소
차가웠던 시간들에 금이 가고 있었다
<오후>
내 무릎을 베고 잠든 너를 내려다본다
고요해서 다정한 얼굴을 본다
내 애인들은 모두 나보다 작았지
너도 그렇게 될까?
오늘보다 어렴풋한 곳으로 발끝을 뻗으며
옅은 숨을 보낸다
같은 그릇에 놓인 음식을 먹고
같은 컵으로 물을 마시고
같은 칫솔, 아, 그건 못할 것 같아
너울거리며 내리쬐는 햇빛
너의 얼굴에 손차양을 해주는 나는
참 이상하지 금방이라도 뭉그러질 것 같으니
우리, 절대 같이 사진을 찍지 않는 사이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는 이야기들은
만들지 말기로 해
도시락의 미지근한 과일을 서로의 입에 넣어 주는
잘못 예매한 영화표를 간직하는 사이
시시하게 끝나는 끝말잇기를 하며
어렵지 않게 빗나가서 안도한 적 있지
넘어가는 해가 무서워
밤이 오면 우리 그림자는 또 흩어져 버릴 거야
손차양을 하는 팔의 힘이 점점 빠지고
손바닥에 느껴지는 네 긴 속눈썹이 간지러워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당선소감>
나는 너무 작고 약해 번번이 휘청거렸다. 언젠가 끝내 무너져 버린 나를 발견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주 울었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많았다. 못 다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의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심을 담아 낼 수 있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다. 온전한 나를 시에 담고 싶었다. 늘 진심이었다.
나는 아마도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휘청거릴 것이다. 휘청거리다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오늘과 같은 순간을 믿어 보려고 한다. 그저 내 자신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여기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 보려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늘 진심으로.
이런 제 진심을 읽어 주시고 최고의 날을 선물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 한 분, 한 분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해 제가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포기하지 않도록 기다려 주시고 이끌어 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이 기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새살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젊음의 비애를 선명한 이미지로 그리는 능력이 좋았다. 상처 뒤 새살을 꿈꾼다는 뻔항 상투성을 극복해 내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전개도 인상적이었다. 소박하지만 진실했고 그래서 감동이 있었다. 심사자들의 몫은 여기까지다. 새로운 시인에게 무한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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