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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연 - 당신의 당신 외 5편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신의 당신>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 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 봅니다 

 

 

 

 <투명한 모래사장>

 

 모래사장에 야자나무 몇 그루

 그것은 거짓입니다

 

 자꾸만 사라지는 발자국

 누군가에게 나는

 소문으로만 존재합니다

 

 층층마다 멈추는 엘리베이터

 아무도 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장난 혹은

 소문과 소문들

 

 저 혼자서도

 만원이 되어버린 순간

 엘리베이터가 움직입니다

 

 무게란 어떤 걸까요

 발자국을 옮겨도

 알 수 없는 것들

 

 거짓말처럼 일정했습니다

 엘리베이터와

 상상 속 야자 열매의

 낙하 속도는

 

 더 빨리 떨어진 쪽이

 더 늦은 쪽을 속였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서로의 속도를 모르고

 

 버튼에 불이 들어오면

 모두 뜨거운 줄 알았습니다

 종종 저는 진실했습니다만

 

 엘리베이터 속 투명한 사람들

 당신과의 모래사장

 그들은 언제 사라진 걸까요

 

 두 뺨의 노을 위로

 밀려오는 파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합니다 

 열린 문 밖으로

 발을 내밀면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발자국과 발자국

 그것은 거짓입니다

 

 

 

 <비>

 

 새는 떨어질 때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나무 아래 자동차

 후두둑 나뭇잎 사이로

 새들이 떨어지면

 자동차는 조용히 등을 내준다

 

 새가 날개를 환상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은 종종

 창문을 뚫고 지나간다

 부드러운 것이 부서지는 소리

 가벼운 반짝임을 잃는 찰나

 

 멈춘 와이퍼 사이로 세계는

 부드럽게도 멀어져가는구나

 어떤 얼굴도 그저 얼굴로

 그것만으로 남는 시간이 온다

 

 우리의 귀 사이로

 흘러가는 물방울 

 새의 울음 그리고 눈동자

 비가 거세져도 나무 밑은

 아직 다 젖지 못한 바닥

 

 자동차 한 대가

 가장 작은 방으로 남아있어

 후두둑 또는 똑똑똑

 곧 방을 비울 시간이구나

 

 새들의 깃털이

 신발에 달라붙는다

 

 비가 그쳤는데도

 새들은 떨어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정말 우린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도

 

 죽은 새들처럼 비가 내렸다

 그렇게 써봤다

 

 

 

 <우리의 사바나>

 

 우리가 마주 선 순간, 함께 바다를 닮은 밤의 장막을 잡아요. 오늘부터 이곳은 우리의 열대, 우리의 사바나. 우리는 머나먼 그 땅에 붉은 두 뺨을 두고 와요.

 

 초원 위를 함께 걸어가요. 바싹 마른 풀들이 우리의 무릎을 스쳐요. 무릎과 무릎이 하나일 수 없듯, 우리는 저마다 건너야 할 땅을 갖고 있어요. 눈을 감으면 검은, 겹겹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사바나를 불러보지만, 점점 희미해져요. 올리브처럼 빛나는 밤의 땅, 두드리는 비. 우리가 함께 걷던 그 땅은, 어디로 갔을까요. 하나의 땅이 둘로 나뉘는 시간. 당신이 우기 속으로 걸어들어간 지금, 나는 뜨거운 열대에 머물러 있어요.

 

 빗속을 걷는 당신은 두 손을 들고, 손지붕을 만들어요. 당신의 지붕과 나의 지붕 사이를 달리는 투명한 얼룩말. 우리는 잠시 정지한 채, 사라져가는 얼룩말의 흰 무늬를 봐요. 풀 냄새 나는 비가 내리면, 신호등이 푸르게 차오르고, 횡단보도 위에서 당신이 나를 통과합니다. 잘가요, 나의 사바나. 

 

 

 

 <커튼>

 

 아내는 커튼이 되었다. 오래도록 표정이 없던 아내는 문득 아름다웠고, 순간 무수히 넓어졌다. 마지막 기억 속 아내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때로는 뒷목을 쓰다듬으며, 쏟아지는 빛 앞에서 아내는 잠시, 그림 속 여자 같았는데,

 

 고요가 번지자 어둠이 가득했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창밖으로 휘날리는, 떠날 듯 떠나지 않는, 커튼을 걷을 수 없었다. 커튼이 진짜 커튼인지, 아내의 뒷모습인지, 그냥 너울거리는 커튼 그림인지. 커튼 뒤의 풍경, 나무들은 뿌리부터 창백한 표정. 커튼을 걷으면 유령이, 투명한 아내의 사라진 발목이, 커튼을 걷으면, 아무것도, 커튼이 곧, 벽이었을까 봐,

 

 창문을 가득 덮은 아내의 얼굴. 나는 오래 그 앞에 서 있었다. 벌을 받듯 손을 들고, 커튼을 붙잡았다. 부드러운 천. 오돌토돌하게 솟구치고 파고드는 실의 물결. 나는 커튼을 붙잡고 울었다. 두 손에서 일렁이는 따뜻한 파도. 아내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 뒤는, 알 수 없는 곳.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늘. 거대한 눈꺼풀처럼 방과 밤, 세계를 덮는 커튼. 아내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오래도록 거기에 있었다.

 

 

 

 <복숭아>

 

 이번 여름은 유독 더웠다

 모든 여름이 그랬으나

 

 둘 다 벗고 잠들었다

 그런 날이 자주였다

 

 복숭아를 씻는다

 씻다보면 사라지는

 복숭아의 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끈질기게 따라붙으면서도

 금방 사라져버리는

 

 누군가와 오래 사는 법을

 일찍 깨달은 사람들

 

 더위는 우리를

 더욱 멀리

 

 서로 얼굴을 보며 잠든다 

 반질반질한

 복숭아의 표정

 

 너의 등

 검은 머리카락

 등뼈의 곡선

 

 우리는 너무 많은 털들을

 잃어버린 채로 지금까지 왔구나

 

 가끔 물어보고 싶어

 우리는 어디서 왔냐고

 이렇게 매끄럽고 징그럽게

 

 가끔 털 몇 가닥이

 입안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오래되어도

 견디기 힘든 것들이 있다

 

 사라진

 복숭아의 털

 

 여름이 지나면

 어디선가 자라날

 

 

 

 <당선소감>

 

 서촌에 있는 이상의 집을 두 번 찾아가고, 두 번 실패했습니다. 처음엔 내부를, 다음에는 외부를 수리 중이었습니다. 늘 어디를 허물고 있는 이상의 집을 보며, 어쩌면 세 번째 방문에도 이곳은 제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게는 시가 그랬습니다. 다다르고 싶은, 그러나 늘 스스로 허물어지는 집. 완전한 순간을 영영 모를 것만 같아 두려웠습니다. 안과 밖을 다 허물고 나면, 그 후엔 무엇이 남을까요. 그 부서짐 끝에 남은 것이 아주 작은 돌 하나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걸까요.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 작은 돌이 주는 아픔을, 보고 싶었지만 끝내 보지 못한 그 얼굴을,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히 쓰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모를 때 사랑이 생겨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당신의 모든 것을 알 때 당신은 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으로 끝까지 모르려 합니다. 몰라서 아름답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사랑을 담아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당선작으로 결정한 당신의 당신은 시적 감각이 신선하고 섬세하며 사유의 개성이 깊어 신뢰가 갔다. 새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내면적 삶을 성찰하게 하는 높이가 돋보였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의 미래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