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의 잠>
뜰채에서 튀어오른 물고기가 수조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잠을 잔다 비가 수면을 두드린다 물살이 물고기를 조금씩 밀어낸다 한 물고기는 뭍에서 헐떡거리다 죽는다 물고기들의 미래에 놓인 것은 얇고 길고 번쩍이는 흰 것
물고기는 꿈을 꾼다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달린다 정해진 낙차를 따르는 플롯 눈이 먼 늙은이는 젊었을 때 괴물이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었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그는 진창이 된 길 위에서 지쳐버렸다 자신을 이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린다 그는 쓰러져 숨을 몰아쉬다 죽었다
몸 위로 칼날이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어떤 사람들은 물로 뛰어내린다 바깥은 있습니까 나는 잠에서 깬다 마적 떼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죽는다 죽은 반역자와 왕좌에 앉은 사람 하나의 트랙을 번갈아 달리는 열차들 비가 무덤의 흙을 다진다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떠올린다
죽은 늙은이의 볼에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 그것을 적셔주는 빗물같은 것, 가축의 숨통, 물고기의
깊은 잠.
<어둠X>
핌은 커피를 휘젓습니다. 각설탕 일곱 개가
새까만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집니다.
과학 선생이 핌이 타준 커피를 받아 듭니다.
핌은 단 한 번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과학실에서 그랬습니다. 포르말린이 가득 찬
표본 통에 담겨 있는 새와 개가 그것을.
죄는 보존됩니다.
너무 단 커피를 마셨을 때처럼
핌은 시달립니다.
결국 모든 것이 밝혀질 겁니다.
과학 선생이 우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새와 개의 내장이 훤히 보입니다.
핌이 그림자에 잠긴 화단을 내다봅니다.
목격자들처럼. 화분에서 쏟아진 흰 꽃들이 누워있습니다.
사고뭉치 고양이들이 마구 뛰기라도 한 걸까요?
핌은 뒹굴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교정 뒤편에서 보았습니다.
뱃가죽이 파헤쳐져 있습니다.
핌은 고양이를 묻어주었습니다.
핌은 짝꿍의 생선을 대신 먹어주기도 하는 아이입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결국 차갑게 식을 것입니다.
최후에는 모든 것을 잡아먹은 가장 어둡고 무거운 것만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과학 선생이 우주에 대해 말했습니다. 핌은 상상합니다.
나선 은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에서 은하 고양이가
알처럼 몸을 둥글게 만들어 빠져나가는 모습을.
핌은 이불 고치 속에서 웅크려 잡니다.
헤엄칩니다. 어둠이 수면을 휘돌며 핌을 쫓아오고 있습니다. 마주합니다. 됩니다. 가라앉습니다. 핌이 변론합니다. 저는 나쁜 아이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모두
부결됩니다.
활강합니다. 거대한 망치가 핌을 세 번 내려칩니다. 핌이 있던 자리에 반향만 남았습니다.
깨어나면 팔뚝에 비늘 같은 땀이 맺혀있습니다.
사흘입니다. 다시 꿈을 꿉니다.
알려졌습니다.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핌은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습니다.
꽃들은 자꾸 눕고 죽은 고양이들이 자꾸 발견됩니다.
새와 개는 풀려났습니다. 내장을 드러낸 채 바닥에 누워있습니다.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고양이들의 짓일까요?
버려진 종이컵에 남은 설탕 알갱이들을 개미들이 핥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은하 생선들도 있다고 믿기로 합니다. 은하 고양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먼 은하로 떠난 은하 생선들도 있다고 말입니다. 나는 생선의 행방을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핌. 돌아오길 바랍니다.
우주의 5%만이 물질입니다.
핌이 알지 못하는, 핌을 알지 못하는
새와 개가 있습니다. 영영 그럴 것입니다.
과학 선생은 여전히 단 커피를 마십니다.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핌. 핌.
우주의 계절이 겨울로 향하고 있습니다. 교정 뒤로 검은 고양이가 돌아와
허리를 구부려 배를 핥고 있습니다.
<카고 컬트>
너는 늙은 개를 안고 있었다 네 발밑으로 그림자가 새어나와 있었고 나는 너와 개의 그림자를 분간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숲의 잎사귀들이 흔들렸다 개는 나무 둥치 아래에 누워 있었다 늙은 개를 검은 혀들이 핥아주었다 개들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너는 믿었다
늙은 개는 네가 울 때 얼굴을 핥아주곤 했다 나는 네가 기도하는 동안 개에게 흙을 덮어주었다 나무가 될 것이었다 수의사가 되고 싶어 했던 누나는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보지 못했으나
가지가 서로에게 엉겨 붙어버리는 나무들도 있다고 했다 네 눈물 자국 위로 숲의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멀리서 소나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숲의 그림자는 들판으로 넘어와 있었다 우리는 마을회관으로 향해 뛰었다 내 그림자와 네 그림자가 포개졌다
신이 아닌 것을 찾아야 했다
<빛을 부수는>
밤에 그네를 타면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그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네에 드리운 어둠이 조금 휘어있다
그네에 속력이 붙기 시작한다 지구 탈출 속도는 11.2km/s
팽팽해지는 사슬 미세히 진동한다 스치는 공기 삐걱거린다 정말 어딘가로 나는 어둡고 어두운
붕 뜨면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소련은 개를 태운 위성을 발사했다 쿠드랴프카는 우주로 떠났다
너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소련의 위성은 지구 주위를 돌다가 대기권으로 떨어졌다 나는 착지한다 그네 안전 펜스도 넘지 못한 채
사슬이 요동친다 뛰어내린 그네의 리듬이 부서져 있다
너는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나는 네 얼굴에서 길을 만들며 흘러내리는 빛들을 봤다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빛들이 흔들렸다
나는 너무 캄캄하지 않은
적당한 어둠에 마음을 담가놓은 채 죽지 않았고
한 과학자는 물체가 빛의 형태로 에너지를 뿜어내면 질량을 잃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다가
캄캄한 빛이 보인다 나는 너와 대화할 수 있다
달에는 "우리는 모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왔다"라는 문장이 새겨진 기념 플레이트가 있대
나는 어둠을 휘어놓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외우주로 나간 탐사선은 모든 기능이 정지해 우주 저편으로 멀어질 예정이다
플레이트가 달에 놓일 때 베트남에선 전쟁 중이었대 최소 백만 명이 사라졌는데
네가 없다 목소리가 어둠을 가로질러 사라진다
지구는 그런 리듬을 갖는다
망해라 다 망해버려라
그네가 혼자 리듬을 회복한다
팽창하거나 축소하여 멸망하는 우주론을 거부하고 과학자는 영원하고 정적인 우주론을 만들어냈다
세계가 아름다울 것이라 믿었으므로
나는 그네에 다시 올라탄다
과학자는 물리학자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수식을 만들었다
E=mc2
거대한 빛이 도시를 덮친다 나는 공원 바닥을 뒹군다 그네의 한쪽 사슬이 끊어져 있다 전쟁이 끝났다 과학자는 자신의 우주론을 폐기했다 죽은 그네가 흔들린다
그네만도 못한 지구에 정오가 오고 있다
<바리온 음향 진동>
초기 우주에선 빛과 물질이 하나였다 빛과 물질이 분리되면서 남긴 흔적은 리듬이 있다고 한다 너는 식탁에 놓인 태엽시계를 우두커니 보곤 했다
도시에 위령비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리가 없는 음향이 들린다 음향이 공기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네가 떠난 식탁에서도 여전히
맥주에 거품이 일고 세계는 아주 잘 돌아가는
맥주를 들이켜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너는 식탁에 쓰러져 울곤 했다 식탁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우주의 구조는 거품처럼 생겼다고 한다 나는 맥주거품 속 텅 빈 공간을 본다 거품이 무서운 속도로
허물어진다 너에 대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시계가 망가진 태엽으로도 여전히 움직인다
취하면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는 걸 보게 된다 그런 꿈을 꾸고 맥주를 더 마시고 더 많이 죽고 나는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음악이 끝나도 어떤 음향은 끝나지 않고 너의 얼굴은 무너졌는데 식탁의 울림이 나는 그런 리듬을 갖는다
의자에 그림자가 진다 너 없이도 대화가 지속되고 있다
말이 허공에서 자꾸 지워진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도 양자들은 끊임없이 태어났다가 거품처럼 무너지며 미량의
에너지를 만든다고 했다 대화가 무너지고 있다
그림자가 진폭을 갖는다 조금씩 자라고 있다
취해서 찬물에 들어가면 이완되었던 모세혈관들이 수축하고 그 압력이
심장을 멈춘다는데 욕조에 누워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메아리친다 나는 그런 힘으로
절망하지 않았다 물무늬들이 모여 물결이 된다 물이 욕조를 넘는다 작은 진동도 지반을 조금씩 뒤틀고
그림자가 식탁에 쓰러져 울고 있다 물리학에서 정보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맥주 거품이 터진다
울음이 식탁을 무너뜨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죽는다 깨어나면 밤새 맥주가 식탁에 놓여있었다 김빠진 맥주를 개수대에 흘려보낸다 별은 죽을 때 폭발하고 사라진다
사라지며 거대한 에너지를 내뿜는다고 한다 우주에서 끊임없이 별들은 태어나고 빛을 내고
죽는다 죽고 죽더라도 죽어 죽지만 죽는다 창문으로 빛이 쏟아진다 빛기둥이
식탁에 머물고 있다 영혼이란 게 있습니까 그런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밝습니까 혹은 어둡습니까 위로받을 수 있는 성질입니까 그것은 천국에 갑니까
수소를 제외한 원소는 별이 죽을 때에 생성된다 음향이 다른 음향을 무너뜨린다 음악이 되고 있다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중 십 퍼센트만이 수소다 사람은 죽은 별에서 왔다
빛기둥이 식탁과 시계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끊임없이 무너지는 양자들이 우주를 거품 구조로 만들었고 빛과 물질이 분리되면서 일어난 파동이 은하의 분포를 결정했다고 한다 음악이 구조를 만들었다 망가진 채로 초침의 리듬을 유지하던 태엽시계가 멈춘다
많은 폭발 있었다 그 이전에
너와 나는 별이었고 빛이었다
우리 은하는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에 속한다고 한다 라니아케아의 뜻은 하와이어로 무한한 천국
나는 이제 너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다
우주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우리는
아주 작은 하나의
점이었으므로
좆까라 나는 과학을 믿지 않는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비틀리고 있다 그런 리듬을 가진다
음향이 세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누수 소년>
소년이 모두를 사랑하길 바라자
소년은 납작하게 쏟아진다
냉장고에서 차갑고 어두운 네모가 되고
꽃병에선 붉고 향기로워지는 꿈을 꾼다
쏟아진 물고기가 바닥에 누워 헐떡이자
소년은 꿈에서 깬다 다시 어항이 된다
물고기는 자리를 찾아
소년의 가슴에서 헤엄친다
기계가 되면 비로소
창을 꼬나 쥔 병사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
물고기가 속삭였다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항이었듯
넌 태어났을 때부터 훌륭한 병사였어
소년은 아무에게도 사랑한다 하지 않았는데
조금씩 줄줄 새고 사라진다
물고기는 더 자란다
몸이 한없이
자라고 열리는 소년의 꿈
무한하게 감수분열하여
아이가 된 무한 명의 소년이
무한히 선언하거나 유예하고
입 맞추고 뺨을 올려붙이고
폭정을 일삼고 혁명을 일으키고
빌딩을 불 지르고 드럼통에 불을 땐다
촛불은 죽은 고래들을 위해 기도하는 손처럼 타고
교량을 태우는 불은 못 박힌 사람들처럼 탄다
소년이 끓어 공중을 흘러다니고 내리고
쓸어버리고 넘치고 가물고 몰아치다
무한히 사랑을 고백하는
다중우주 꿈
꿈을 꾸는 동안에도 소년은 조용히 새어나간다
지구 반대편에서 사람이 쓰러진다
사내가 잠에서 깨어났다 뻐끔
사내가 붙인 담뱃불에서
포연처럼 연기가 피어오른다
뒤늦게 총성이 도착한다
소년이 새어나간다
<당선소감>
당선되면 기쁠 줄 알았다.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버린 것 같다. 선진국에서 소비하는 일이 후진국을 착취하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엉망으로 취하는 날이 많고 생활을 바꾸려 하진 않는다. 당선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나다. 나는 무언가 비틀린 것 같다. 관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적당히 살다 죽고 싶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무언가를 먹을 것이고, 차지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세계를 조금 구부려보려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세계가 다른 리듬 쪽으로 조금은 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믿어보기로 한다. 누구를 위한 예의이고 누구를 위한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내 예의이고 최선인 것 같다.
좌절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 나 말고도 누군가가 쓰고 있다는 것, 읽고 있다는 것. 이러한 사실이 글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도왔다.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는 글에도 세계에 대한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구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족한 시를 좋게 봐준 심사위원님들과 지면을 내어준 한국경제신문사에 감사드린다.
글을 읽고 쓰는 이들에게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지금까지 내 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앞으로 내 시를 읽어줄 가족, 친구, 독자, 선생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첫 독자였고, 앞으로도 첫 독자일 애인에게 감사를. 그리고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새해가 모든 사람에게 안녕하길 빈다.
<심사평>
설하한의 물고기의 잠은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설하한은 큰 스케일과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응모자였다. 신화적 상상력을 육화해 시의 소재로 삼고, 떠돎과 회귀라는 서사를 시의 구조에 장착할 줄 안다. 이런 이미지와 진술의 조직력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의 시는 이미지가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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