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박스>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신기록>
나는 레몬 너는 ###
나는 노란머리 너는 검고 투박한
조이스틱을 잡고 우리는 열심히 발을 굴렀다
저녁이 몇 번이나 사라지고 우리의 손에 드디어 망치가 쥐어졌다
너는 쓰다 만 일기장을 문 앞에 던져둔다
일기는 방명록이 된다
너는 우리들의 자랑(아무것도 걸어놓지 않은 하얀 벽을 너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건 권태도 포기도 아니라고 너는 말했고 나는 믿었다)인 하얀 벽에 빔 프로젝터를 쏴 거대한 스크린을 띄웠다 조이스틱보다, 스틱을 만지는 우리보다, 우리가 꼭 붙어 보던 작은 TV화면보다
커져버린 세계가 조금 두렵지만
망치가 있어서 괜찮아 여차하면 부수고 나가버리자 돌아와서 다시 짓고, 쌓고, 조립하다보면 이것도 우리들의
소파 양 끝에 비스듬히 누운 우리는 자꾸만 발이 부딪힌다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우리는 뭐라도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빨과 이빨이 맞닿는 순간에 나는 믿어버리게 되고
너는 망치를 쥔다 어깨를, 가슴을, 뒤꿈치를 순차적으로 허문다
화면 속 우리는 조명과 거치대 같고
노란머리가 검은머리를 만난다
나는 고개를 들고 너는 스틱을 움직여 말을 건다
내가 조이스틱을 놓치면 너는 정지 버튼을 누른다 거실은 거대한 실내 체육관처럼 조용하고 신중해진다 너는 이층에 있고 나는 이층에서 떨어진 셔틀콕 같다
그림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스크린에 드리워진다 하얀 벽을 천천히 쓸며 지나간다
하얀 벽을 지울 수 있는 건 그림자
하얀 벽을 떼어내자 무수한 픽셀이 쏟아져나온다
의자에 앉아 나는 네가 세계를 만들고 부수는 장면을
하얀 벽이 끊임없이 무언가로 채워지는 장면을
본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노란머리가 괴물에 잡아먹힌다 검은머리는 옆에 망치를 쥐고 있고
엔딩 크레디트
1. ???
2. ???
3. ???
스크린을 기점으로 거실을 접으면
우리는 잘 포개진 건축이 된다
<소녀의 생각 공장>
촛불을 켜고 입장하세요
구석에 숨어도 타지 않을 거예요
옷장은 넓고 발화점은 높아요 타 죽은 새보다는 구워진 새가 아무래도 죄책감이 덜합니다 말장난처럼 죽은 자국들, 엄마는 유년 시절을 야단치는 중이에요 사실은 그때의 꿈을요 매를 건네는 엄마 손, 락스 냄새가 나요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인공 겨울
입지 않은 계절을 밤새 빨아대는 정성으로 엄마는 둥지를 만드는 사람
떠나는 법을 배운 새들은 제일 좋아하는 옷 한 벌을 두고 간답니다 이런 걸 관성이라고 우기던 언니는 촛농처럼 울다가 다 타버린 애인을 쫓아 남쪽으로 떠났어요 그곳은 빙하가 많아서 아무리 울어도 다 녹지는 않을 거예요 그걸로 안심이 되는 나는
지평선이 흘린 노을처럼 오늘의 일당들이 밀려오는 풍경을 멍하니 보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나라의 아이들을 미워합니다
감독관의 파리채에 죽은 파리는 죄다 졸고 있던 중입니다 그래야만 저들이 죽어버리는 상상을 양심도 없이 할 수 있겠어요 눈꺼풀이 감겨오지만 허덕이며 잠겨오는 것들이 더 무겁습니다
온 힘을 다해 재앙 같은 프레스기를 눌러댑니다 인형의 속살을 찍어내는 무게는 우리들 뼈보다 단단합니다
무엇이든 포장하는 법만 배운 나는 저 먼 나라의 철없는 도련님을 위해 불필요한 몇 개의 손가락을 포장해 보냅니다 엄마는 그걸 가난한 마음이라고 불러요
공장의 내장은 온통 회전하는 습성 우리는 작은 우주에 살고 있고 나는 이곳이 마지막 우주이길 간절히 기도해요 인형의 눈이 나를 보고 감독관의 눈이 나를 보고 공장의 모든 구석 자리마다 거미보다 많은 눈이 살아 움직입니다 문득 지구가 싫어져서
쾅- 쾅-
발자국보다 먼저 엄마의 우는 얼굴이 찍혀옵니다 아끼는 옷을 숨겨두던 버릇이 공장에 갇혀 말라가고 멀리서 자살을 꿈꾸던 새들이 가지를 물고 돌아옵니다 태생이 가녀린 관성은 이다지도 바쁘게 앓는 중입니다
무엇을 만드는지, 왜 만들어지는지 우리는 서로 모르는 것투성입니다 이런 낯선 감각이 언니를 데려간 걸까요
고개를 돌려 컨베이어 벨트의 끝을 볼 때마다 완성된 인형이 나를 보고 웃습니다 나도 따라 웃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죽은지도 산지도 모르는 것들을 오래 쳐다보면 귀신이 들린다고, 마루 밑에 숨어 죽은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나는 자꾸만 설레서
어디론가 살아있고 싶어집니다
북쪽으로 갈까요 자매가 남북으로 흩어지면 엄마는 아마 갈라져버릴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듭니다 오래된 사람 하나가 누운 모습으로 하늘에는 앙상한 철근들이 빼곡합니다 공장 문을 나서면 아무도 모르는 밤이지만 북쪽을 향해 걸으면서 나를 아는 사람들을 오래오래 지울 생각입니다 내내 켜두었던 촛불이 어는 곳까지, 어니의 눈물 대신 촛농이 펑펑 내리는 곳까지
<실루엣>
이불은 우리들의 모함이다 이불에서는 모든 게 유연해지고
우리는 양발을 어루만진다 이불같이, 이불처럼 부드러워진다
이불에 빠지면 거기서 더는 헤어나올 수가 없다
거기서는 더 만날 수가 없고 먼저 떠나는 쪽이
모든 걸 두고 가야 한다
이불은 우리들의 게임이다
이불에서
우리는 춤을 춘다
우리는 여름 옥상의 건조대 같고
유연하게 늘어나는 이불
천장에 흐르던 구름이 멈춘다
이불은 포근하지 이불은 따듯하다 이불을 오래 덮고 있으면 영혼이 데워진다
너는 눈치가 빠르고 더운 걸 싫어하지 그런 아이였다
그런 아이는 먼저 일어나고 먼저 잔다
그런 아이는 이불을 걷어내고 나는 끌어안고
손을 뻗어도 잡히는 게 없었다
오래 익은 우리는 이불보다 더워서 다음 여름이 오기 전에 누구든 떠나야만 했는데
너는 이불을 나갔다 다 익은 마음을 두고
나는 이겼지 이겨서 기쁘다 그거면 됐어 그거 말고는 달리 자랑할 게 없다 자랑스러운 이불 우리가 이겼어
이불이 잘 정돈된 방은 아득할 만큼 건조하고 무섭고
또 아름다워서
조금만 가져가도 될까?
너는 꼭 죽은 것만 같다
죽은 것을 만지는 것 같다
<모멘텀>
과자를 흘리면 벌을 받는다 그렇게 자랐지 아빠가 죽어서 과자를 흘려
비스킷이 우르르 부서져내렸다 애인은 네모난 침대에 누워있고
나는 빗자루를 찾는다 애인에게 묻기도 했지 빗자루가 있을까?
빗자루는 없었고 대신 너는 코를 골았다 언제부터 우리는 편하게 등을 보이게 되었을까
나는 과자를 치우고 과자와 먹던 음료수를 치우고 휴지를 가져왔지
도무지 부스러기를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보고 있었다
대체로 둥글고, 그렇지만 원은 아닌
과자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더는 부서지지가 않아서
대신 죽은 아빠가 떠올랐지 잘 정돈된 책장에 누워 애인과 나와 부스러기를 지켜보는 눈
아빠는 화가 났을까?
나는 천천히 옷을 벗는다
애인을 깨우고 싶었는데 애인은 너무 따듯해 보였어
나는 내 등을 만져보았지
잠깐 눈을 뜬 애인이 여전히 벽을 바라보면서
옆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편히 누워 자라고 이렇게 하얗고 깨끗한 집에서는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지겨운 꿈 지겨운 나체 지겨운 벽과 애인의 등
애인의 등에 아빠가 누워있다
애인은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하지
다 안다 다 이해해 우리 아빠가 내 얼굴을 뭉개면서 펑펑 울던 것처럼
나는 사람을 잔혹하게 만들지 일그러지게 만들지
하얗고 깨끗한 집이 모서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반쯤 남은 집은 머리통처럼 둥글고 잔인한 모양
화장실에 들어간 애인이 나오지 않는다
<암막 커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베란다에 모여있다
양파는 억울을 먹고 자란다 나는 저녁용 찌개를 위해 양파를 잡는다 도마 위에서 양파는 잘린다 잘린 단면으로 눈물이 떨어진다
그것이 양파의 최선
억울한 사람들은 문을 두드린다 문의 이름은 당기시오
간혹 과열된 이름이 베란다 밑으로 떨어진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저녁이
부엌에서 맛있게 끓여지고 있고 냄새가 난다 죽은 양파 냄새가
나는 도무지 화목한 식탁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커튼을 쳤다 베란다에는 여전히 억울한 사람들이 죽어있고 아무도 밥을 먹을 때 어두운 곳을 쳐다보지 않는다
식사가 멈추고 나는 밥그릇에 붙은 몇 개의 밥알과 씹히지 않는 양파 꼬다리를 싱크대에 헹궈냈다
배수구로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또 다른 양파를 만나면
우리는 그들을 최대한 불쌍하지 않게 바라보았다고
어두운 저녁에도 밝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말해주길 기도했다
이 불온한 식탁에서 죄책감이 자라지 않도록
커튼을 치면 아침이 온다 아침의 이름은 미시오
베란다에서 걱정이 자란다
걱정은 누가 대신 먹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하한 - 물고기의 잠 외 5편 (2019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0) | 2020.11.10 |
---|---|
박은지 - 정말 먼 곳 외 5편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0) | 2020.11.10 |
이원석 - 그림자 숲과 검은호수 (2020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0) | 2020.11.10 |
김건홍 - 릴케의 전집 외 5편 (2020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0) | 2020.11.10 |
고명재 - 바이킹 외 5편 (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0) | 2020.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