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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홍 - 릴케의 전집 외 5편 (2020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릴케의 전집>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

 

 

 

 <먼지 속 여름>

 

 저 솜구름은 내 거야

 창가에 하염없이 서 있던 네가 말했다

 

 나의 머릿속을 까맣게 채운 단어가 있었다

 책상에 앉으면 그것이 떠오를 것 같았다

 

 솜구름은 느리게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너는 자신의 구름을 보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책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거기에 꽂혀 있는 사전은 내게 소용이 없다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 너는 자꾸 나를 잊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창가에 서 있다 창틀을 닦아도 먼지가 쌓여간다

 

 

 

 <나의 가상인물 영선>

 

 나의 가상인물 영선은 기억하지 못한다

 중고로 산 피아노가 언제 사라졌는지

 누가 어떻게 그 무거운 것을 영선의 눈을 피해

 빼돌렸는지

 

 영선은 남겨진 피아노 의자에 앉아

 체르니 40번 교본을 천천히 훑어본다

 

 영선의 얼굴로 바람이 불어서

 창가를 보면 굳게 닫힌 창과 그 너머로 촘촘히 떨어지는 빗물이 있다

 맞은편 빌라의 옥상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영선은 음울한 노랫말을 흥얼거린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을 제외하고

 

 등받이가 없는 피아노 의자 뒤로 나자빠질 때까지

 

 나의 가상인물

 영선의 단전이 딱딱해진다

 커튼이 아까와는 다르게 구겨져 있다고 영선은 믿는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

 

 

 

 <금관 악기>

 

 나는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다.

 그는 먼지가 잔뜩 낀 악기를 들고 집을 나선다.

 그의 악기가 튜바인지 트럼펫인지 호른인지 모르겠다. 색소폰이었던가. 나는 채널을 돌리고 있다.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채널을 고정한 채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그는 번들거리는 아스팔트를 따라

 휘어진 금빛 통로를 따라올 것이다.

 식당에 들러 점심을 해결할 수도 있다.

 사건처럼 그가 닥쳐온다면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실연될 수 없는 악상이 떠오른다.

 

 시간이 또 얼마나 흘렀는지

 그가 언제 온 건지 모르겠다. 그가 현관 앞에 서 있다.

 여러 금관 악기들을 몸에 두른 채 아주 크게 심호흡을 한다.

 티브이가 있는 거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외출 시에는 밸브를 잠가야 한다고 나는 그에게 소리친다. 나는 음소거를 누른다.

 그의 방에서 무언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걸 듣고 있자니 졸음이 온다. 낮잠을 자면 악몽을 꿀 것이다.

 

 

 

 <외투>

 

 너는 나의 왼손을 가져간다.

 이것은 나의 부적이야

 나의 손에 작고 단단한 것을 쥐여준다.

 

 나는 기차에 올라 지정된 좌석에 앉는다. 네가 손을 흔든다.

 그 무엇도 내리치고 싶지 않고

 가위바위보도 하고 싶지 않은

 나는 주먹을 흔든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기차가 출발한다. 점점 속도가 붙는다.

 풀린 신발 끈을 내버려 둔다.

 

 풍경이 펼쳐진다. 춤을 춘다.

 

 네가 만든

 나의 작고 단단한 주먹에서 땀이 난다.

 

 외투 안쪽에 티슈가 있다.

 그러니까 심장 쪽에 

 

 

 

 <빛과 소음>

 

 모두 조용히 해 주세요

 입 열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화장실 가지 말고 조금씩 싸서 말리세요

 앰비언스 딸 때면

 현장 스태프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자 숨을 참았다

 빛이 자꾸 간지럽혀도

 의식하지 마세요!

 

 동시녹음 선배는 매번 무리한 부탁을 해

 몇 명은 호흡곤란

 오줌 지리고 마비를 겪고

 

 그래도 동아리 신입인 우리들은

 조악하게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그래도 영화 같다고 말했다

 

 사운드 때문이야......

 

 동시녹음 선배가 슬며시 다가와 한 마디 던지고 사라지면

 우린 선배가 남기고 간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것이 현장 장악력일까

 

 이어진 뒤풀이에서 동시녹음 선배는 기절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대낮이 낮 같다는 사운드 때문이었다

 

 선배는 인물이구나

 진정 씨네필이구나

 빛과 소리구나

 

 동방에서 선배는 죽겠다며 해물 라면을 들이켰고

 선배 음향 좋아요 우린 시체 목소리로 말했다 

 

 

 

 <당선소감>

 

 어디에서 어떻게 세계와 마주해야 하는지 늘 고민했다. 그런 고민 속에는 내 존재 또한 한 곳에서 정립되리라는 믿음과 동시에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세대적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디서 세계를 보고 있는지,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는지 불확실하고 보이지 않았다. 이는 정작 눈앞에 놓인 세계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시를 써나가면서 들곤 했다. 시를 통해 그 방향을 조금씩 틀고 잇는 것 같다.

 시는 내 위치를 때론 작은 의자 위로, 때론 발코니로, 숲으로, 이국으로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곳으로 옮겨 놓곤 했다. 시는 내게 무한한 시선과 시점으로 세계를 포착하는 즐거움을 알려줬다. 내 앞에 매 순간 달리 놓이는 세계에 눈을 돌리겠다. 축복처럼 주어진 현상들과 사물들을 깊고 차분히 감각해 보겠다.

 부족한 글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부족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지난 1년, 내 시보다 먼저 내 존재를 헤아려주신 김민정 선생님께, 흐릿하게 서 있는 나를 언제나 선명한 곳으로 인도해주신 이수명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반짝이는 문학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명지대 원우들과 진심으로 서로의 시를 빚고 서로의 힘이 되어준 시 스터디 쓺의 문우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 나 자신보다 한발 먼저 나를 믿고 응원해준 지영에게 감사드린다. 

 

 

 

 <심사평>

 

 당선작을 놓고 끝까지 겨룬 것은 송은유와 김건홍 작품이었다. 송은유의 화분의 위의는 언어를 자기 식으로 감각 있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수준급이고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대의 풍경들을 그릴 줄 안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반면 부분 부분 문학적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한 표현들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숙고와 토론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건홍의 릴케의 전집은 간결하고 압축적이면서도 비의와 상징성이 풍부하다는 점, 열린 서사 구조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 동봉한 시편들의 편차마저도 금방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이게 했다. 앞으로 한국 시의 새로운 지층의 결을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흔쾌하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