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버리고
네가 다가올 땐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뒷목을 핥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교회 십자가가 네 귀에 걸려 찢어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빨갛게 물들어 일렁거렸다
네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더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이 배는 오래됐고 안이 다 삭아버려서
더 타다가는 우리 정말 하늘로 간다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 보면서
실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눈 밑에서 해가 타는 것을 느꼈다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눈 내리는 부족>
아주 흰 개 꿈을 꿨습니다 눈보라 속을 뛰고 있었어요 발이 다 젖었는데 몸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개는 너무 작았어요 광활한 눈밭에 비해, 그래도 개는 달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꿈 전체가 흔들려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멀리서 보면 눈과 다를 바 없던 뜨겁고 작은 몸, 시야를 가리는 그 지독한 눈보라 속에서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달렸다 사랑을 다 풀어주려면
목줄을 풀 듯 밖으로 나가서 달려야 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개가 죽었다 왜 이 집에 왔니 하얗게 헐떡거린다 개들은 몸을 벗고 코끝을 밝혀서 주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온다고 하던데 잘못 온 거야 빨간 혀를 온도계 끝까지 내밀어도 어쩔 수 없다 몸이 통째로 다리가 된대도 갈 수 없어 문 두드리지 마 이번 눈보라는 너무 지독해 자꾸 헐떡이는 숨소리로 내 귀를 핥지 마 나는 빙어를 산 채로 씹지도 못해 손발은 작살 끝처럼 싸늘해서 귀를 막고 커튼을 내린다 흰 개가 짖는다 그러다 온몸으로 문에 부딪친다 쾅 쾅 소리와 목 찢는 소리가 집을 흔든다 시계를 본다 커튼 사이로 창밖을 본다 흰 개떼가 흰 개의 목소리를 듣고 언덕에서 달려오고 있다 사박사박 개들이 눈 밟는 소리는 아름답다 눈 위를 달리는 몸 자체가 해방 같다 눈이 안 보이는 내가 이걸 모조리 봤다면 이젠 문을 열고 대전 아니 평양이라도 발이 터지도록 너를 향해 달려야 할 때가 온 거다
<귀>
지금 나는 가문비나무처럼 조용한 카페, 나뭇잎 사이로 새들이 부리를 내민다 내 뒤에는 머리 긴 여자 농인이 손짓으로 영상 통화를 한다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예의인 줄 안다 세상 모든 이야기가 안 들리는 척, 나는 사랑하는 여자의 시집을 읽는다 조용한 여자의 그림자가 내 책에 닿는다 시 속에서 여자는 나무를 끌어안는다 말없는 여자가 말을 하다 손으로 놓친 새, 그 새가 행간을 바람처럼 스친다 시 속의 여자도 그 새를 올려다본다 시를 읽는데 목이 마르다 나는 비킨다 두 여자가 시와 그림자로 만난다 여자가 손바닥을 펼치자 잎이 뻗는다 시 속의 여자가 손끝으로 나무를 읽는다 아름다운 영혼은 새를 닮아서 길고 매끈한 손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손으로 가문비나무 아래에 서서 새 그림자를 만들면 귀가 파래질 거야 눈이 시리다 나무 사이로 하늘이 샌다 여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끔 손등과 손바닥이 진흙처럼 첨벅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건 내 애인이 허벅지를 철썩 치고 웃는 소리 같다 웃음소리는 듣지 않아도 푸르다
<철거>
너의 얼굴이 은박지처럼 구겨져버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고
발만 구르며 손톱을 물어뜯다가
책상을 정리하고 시를 쓴다
너의 얼굴엔 장미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그런 너의 아름다움을 신이 질투해서
그걸 거머쥐려고
꽃 뿌리를 뜯고 있다고
얼굴 위에 실금이 선명해질 때
나는 너를 위해서 작은 시간을 위해서
아름다운 향기에 관하여 쓴다
어제 꽂아둔 병실의 목마른 장미가
지금도 아픈 사람들의 머리칼을 파고든다고
그렇게 나에게
너는 홀로 죽어가면서
왼손에 의미를 쥐여 주고 있다고
<온몸의 외국어>
풍차를 소재로 시를 쓰는 시인들은 외국 생활을 오래 했거나 망명했거나 그네를 탄 채로 노을을 보는 걸 좋아했거나 외로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말이 가난할 땐 흐린 날의 새가 된다 모든 말이 무릎 밑을 스친다 엎어질 듯 아슬하게 표현되는 몸 스친 자리에는 더러 양귀비가 핀다
어느 나라에서는 남의 말을 시라고 한다 누가 혼잣말로 추워, 라고 말해도 온갖 비평가들이 담요를 들고 곁으로 다가와 모닥불을 피우고 귀를 기울여준다고 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해 질 녘은 이민자들로 넘쳐날 테고 온갖 종류의 빵 냄새와 인사말이 섞이는 그런 아름답고 시끌벅적한 강변을 생각해
어느 나라에서는 외국어를 시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주민등록증을 수거하고 우선 재운다 소수 언어를 잊는 데는 잠이 보약이라고 가끔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은 외국어를 넘어 새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문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는 유리라는 사람이 꾀꼬리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어느 독일인은 탈무드와 토라에 평생을 바쳤다 그에게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유리잔을 감싸 쥐더니 미안해서요라고 답했다 창밖에는 느티나무가 햇살과 섞였다 어느 일본인들은 매달 모여서 윤동주를 읽는다고, 어느 한국인은 히로시마 피폭자의 피부를 보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울었다
누가 울 때 그는 캄캄한 이국입니다
누가 울 때 살은 벗겨집니다
누가 울 때 그 사람은 꽃이 됩니다
꽃다발을 가슴에 안아야겠지요
어떤 기사는 풍차를 보고 돌진했다고 한다 그의 돌진을 솔직이라고 한다 솔직한 눈 꼭 잡은 손 솔직히 말하면 첫눈을 핥고 당신과 강물에 속삭이는 거예요 어떤 이들은 그 풍경을 소중히 여겨서 강가의 조약돌이며 반짝임까지도 모두 모아서 도서관으로 보낸다
<화전>
꽃을 밟고 건너서 볼에 닿는다 빛은 오후 네 시가 되면 창문을 넘어와 여자가 가진 것을 가지런히 누른다 천진난만한 손가락처럼 피아노 위에, 교복에, 여자의 얼굴에 함부로 앉는다 어린 손이 잠시 볼에 닿는다 눈을 뜨면 진달래가 찍힌 것 같다 여자가 일어선다 이불의 자수가 휘청거린다 머릿속엔 도라지꽃이 미쳐서 구른다 허기 속엔 뒤집힌 혀의 보라가 보이지 목구멍엔 젖은 꽃이 헐떡거리지 너무 고단해서 여자는 뱀처럼 아이를 삼켰나 울면서 터널을 내려간 아이, 목구멍엔 구석구석 찍어둔 손자국이 메밀꽃처럼 하얗게 출렁거리고 여자는 가장 긴 손가락을 목에 집어넣는다 새빨간 기차가 단번에 머리통까지 온다 게워낼 때마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 같아서 여자는 이 짓을 자꾸 한다고, 그러다 완전히 텅 빈 씨앗의 기분이 될 때 냉장고를 연다 비닐봉지를 가로로 찢는다 핏물에 부르튼 고기를 굽는다 약불에 선홍빛 피가 올라오면 몽골몽골 매화가 이렇게 올라왔었지 불처럼 두렵고 아름다웠어 마음만큼 느리게 배가 불러왔었지 이렇게 얇은 꽃잎 같은 게, 죽어서도 계속 피를 흘리는 게, 기도 같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그것은 덧없고 뜻 없는 오후의 빛이다 여자는 긴 손가락으로 살점을 누른다
<당선소감>
어렸을 적,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한동안은 문을 열어둔 채로 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모두 사라질 거면 저 많은 별과 두꺼운 전화번호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꽃은 왜 피고 슈퍼 앞 고양이는 왜 목을 긁는지, 그 모든 것들이 알고 싶었습니다.
저를 오랫동안 키워주신 혜능 스님이 작년에 세상을 비우고 걸어가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사랑이 떠나면 가슴 한가운데에 번개처럼 금이 생기는데, 그 금 위로 사랑의 강물이 흐르게 된다는 걸 요즘에 와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이야기가 남습니다. 몸이 사랑이 됩니다. 또한 그 이야기와 사랑조차 시간에 녹아 다 사라진대도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눈부신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사랑하는 김문주 선생님, 사랑의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의 스승이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처음 이곳에서 선생님이 강의했던 날, 칠판에 쓰신 시라는 글자가 제 이마를 뚫었어요. 창이 흔들렸죠. 속이 일렁거렸어요. 창밖은 봄이었는데, 선생님이 나긋나긋 시를 읽어주셨는데, 바로 그때 저는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이상한 확신에 휩싸였어요. 시를 이야기할 곳도, 배울 곳도 없던 이곳에서 저에게는 선생님 단 한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시였어요.
소중한 기회를 주신 문정희,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영남대의 스승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시를 쓰며 걸어온 현정이, 송이, 유신아, 우리 계속 같이 걷자. 같이 산책하자. 동우, 현수, 혁준, 택, 대희형, 승빈, 지영, 상회, 수정, 주은, 늘 고마워요. 끝으로 어머니, 아버지,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면서도, 밤이면 시를 읽어주신 두 사람. 저는 두 사람 덕분에 사랑의 바깥을 몰라요. 영재만 알지. 영재야, 이건 형이 처음 말하는 건데, 너는 형아가 쓴 시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사람이란다.
<심사평>
당선작 바이킹은 한 남녀가 놀이기구 바이킹을 타면서 한순간 겪게 되는 고통과 공포를 통해 우리 삶의 절망과 희망이 교직되는 순간순간을 절실하게 잘 드러내었다. 대한민국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재적 삶이 바이킹을 타는 행위로도 재해석되었다.
바이킹이라는 배를 타는 안식과 기쁨보다는 배가 좌우의 방향으로 높이 오르내릴 때 경험하게 되는 경험과 불안, 고통과 인내 등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과 같다는 의미가 암유돼 있다. 당선을 축하한다. 당선자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이끌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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