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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 발코니의 시간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발코니의 시간>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 있을 당시 이미 겪어 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 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 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 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꼬리잇기놀이>

 

 우리의 대화는

 

 원숭이로 시작해서 백두산으로 끝났다

 

 서로 말꼬리를 잡으며 사과를 맛있게 먹었지만 사과는 서툴러 얼굴을 붉혔다

 

 교합은 닮은꼴을 찾아가는 여행,

 

 한몸이 되기까지는 많은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아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태어났다

 

 내가 바나나 길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동안

 

 당신은 레일을 조립했다

 

 말꼬리를 흐리며,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떠났다

 

 알맹이가 빠져 나간 자리에서 자주 미끄러지고 아픈 방향으로 등을 돌린 채 궤도를 이탈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높은 곳에서 재주를 부리며 살았다

 

 원숭이와 백두산의 관계,

 

 어떻게든 끼워 맞추다 보면 모든 것은 말이 되어 있었다

 

 

 

 <마포대교>

 

 하현달이 젖몸살을 하는 밤이다

 

 다리 위엔 자살을 꿈꾸며 늙어 가는 가출 소녀들

 태동을 하는 뱃속의 아이를 산통 없이

 멍든 다리 밑에 버린다

 

 제발, 주워 가 주세요

 

 유서 한 장 쥐고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제 스스로 차가운 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열 달 동안 손아귀 힘을 기른 등반가,

 희박한 미래를 올려다보며

 어둔 교각을 기어오르다

 담뱃불을 붙이는 어미의 눈과 마주친다

 

 다리 길이만큼 가깝고도 먼 관계

 

 아이는 악착같이 당신의 발등을 밟고 어깨를 짓누르겠지만

 아무리 기어올라도

 다리를 가진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포대교에 울려 퍼지는 저체온의 울음들

 문구용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체리색 립틴트로 태몽을 지운 철부지 소녀의

 다리 밑에서

 

 늙은 아이가 하현달의 유두를 찾는 밤이다

 

 

 

 <구지가>

 

 이 밤, 토끼는 잠들었겠지

 

 나는 거북스럽게 목을 움츠리고 야근을 한다

 

 토끼와 나의 거리는 사계,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삶은 정당치 않았다 정정당당한 밤은 없어 입에서 입으로 노랫가락을 넘겨 주는 것

 

 결승점은 보이지 않고

 토끼가 당근을 쥐고서 잠을 자는 길목이다

 

 나는 미싱을 돌려 끊긴 길을 박음질하고 비몽사몽, 목이 잘리는 꿈을 꾼다 명퇴를 당한 당신은 평생 목 없이 살아가야 한다고 했지 목 좋은 선술집, 닭의 모가지를 비틀고 나면 거북목증후군의 통증을 잊곤 하였지

 

 머리와 몸통을 잊는 노래에서 구운 냄새가 나는 밤, 토끼는 늦잠을 잘 것이고 나는 잘도 도는 미싱 앞에서 한 생을 바쳐야하겠지만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목주름을 잡으며

 

 거북이 달린다 

 

 

 

 <펠리컨>

 

 늙은 새가 주둥이를 벌리자 몸집 큰 새끼들이 달려와 먹이를 쪼아 댄다 한 녀석은 목구멍까지 부리를 집어넣고 꼬리깃털을 세차게 휘저어댄다

 

 어미가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는 일

 

 탄성 잃은 입주름을 끌어당겨 주둥이를 크게 벌려도 꺼내 줄 수 있는 건 토사물뿐, 새끼들의 부리가 한 방향으로 길어지는 날들이었다

 

 세상 모든 걸음은 날아오르기 직전의 몸짓,

 

 펠리컨이 흠집 많은 아랫부리를 초저녁 하늘에 적신다 활어의 별들이 부리 주머니에 담기는 멸종 위기의 서식 풍경, 어미의 입만 바라보는 새끼들 몸집은 갈수록 비대해져 가고 늙은 주둥이는 오래 다물어지지 않는다

 

 삼킨 먹이를 역류해 내는 시간

 

 어미는 삶의 가장 쓰린 식도염을 앓는 중이다

 

 

 

 <장미의 습도>

 

 밤길을 다녔다

 

 어둡고 습한 곳은 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마른하늘에 번쩍, 가시가 돋칠 때마다 전선에 걸린 모가지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해를 보는 날은 화장을 두껍게 한 늙은 여배우의 편이 되기도 하였다 시들지 않으려고 혈자리를 누른 일과 그물 스타킹으로 당신을 붙잡아 놓은 일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

 

 눈 속의 가시는 울어야 뽑힌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방언을 듣던 밤, 그 많은 눈꺼풀을 감고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을 자고 싶어서 나는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발톱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루 살로메 루 살로메,

 

 먹구름이 눈 밑으로 올라왔다 

 

 

 

 <당선 소감>

 

 허기가 졌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구워 먹고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고 있는 사이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전화였다.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나보다 지인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열두 번째 겨울을 보내는 동안 휴대폰을 멀리하게 됐다. 혹시, 문화부 기자님이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전화 빨리 받던데?

 당선작은 5년 전에 써 놓고 묵혀 두었던 시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겨울은 그때였다. 우리, 이제 헤어져.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돌아서는데 나쁜 남자였던 그가 발목을 붙잡은 기분이다. 사는 일이 이렇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던가.

 아무튼 이건 기적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나에게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산성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또, 겨울이 가고 그 길로 다시 추운 겨울이 오겠지만 이제 나는 시편 같은 봄을 기다릴 것이다.

 

 

 

 <심사평>

 

 발코니의 시간은 삶의 고통에 대한 견딤이 죽음의 고통 또한 견디게 해준다는 중의적 의미가 내포된 시다. 정년 퇴직한 뒤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우는 아버지의 현재적 삶과 암벽에서 풍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죽음의 삶을 발코니의 통유리를 경계로 대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적인 해체의 과정을 견디는 풍장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삶에서도 가장 요구되는 인내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성을 풍장 문화라는 구체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점이 이 시의 힘이자 장점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난 듯한 기쁨일 것이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