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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 캉캉 외 5편 (201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캉캉>

 

 발목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불란서 댄서들은 하이힐에 올라야 비로소

 태어나지

 발끝을 모으지

 분란은 구두 속에도 있고

 탁아소에도 있고 어쩌면

 내리는 눈의 결정 속에서도 자라고

 

 오후 세시에는 캉캉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려면 쓸데없는 말들이 필요해요

 식탁 아래서 발을 흔들고

 유쾌해졌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래 휘파람 부는 것 같아서

 뉴스를 튼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가십을 만들죠

 상반신만 보이는 아나운서의 팔을 믿으며

 캉캉은 감춰지는 중

 양말 속에 주머니 속에

 불란서 댄서들의 스포티한

 팬티 속에

 빨간 주름치마가 되어

 덤블링이 되어

 지구가 돌아간다

 

 구세군 냄비에 눈이 쌓이고 내년에는

 내년의 근심이 기다리겠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제왕절개 했습니다 답하겠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은 캉캉.

 발끝을 들어올릴 때마다

 불거지는 중

 

 

 <그래서 넥타이>

 

 셔츠에 팔을 넣습니다 팔이 잘 안 들어가는 날도 있습니다

 셔츠는 소매부터 마릅니까 칼라부터 마릅니까

 수증기는 언젠가 비가 된다고 하니 다음에 비가 올 때는 셔츠를 생각하겠습니다

 셔츠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로마의 다림질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돌 밑에 옷을 깔아놓고 주름이 지면 원래 옷이 이런 겁니다, 하고 옷을 입히던

 그 옷은 주로 사형수를 위한 옷이었습니다

 옷을 자꾸 발음하면 옷이 낯설어집니다

 벌거벗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 때도 옷을 입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어서도 옷을 입습니다

 옷은 오랫동안 사람의 몸을 훔칩니다

 밤새 꿈에 눌려있던 나를 보고 원래 이 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팔아넘기려던

 그 옷도 분명 마른 셔츠였습니다 원망합니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셔츠는 원래 이집트 노동자의 옷이었으니까요

 

 안녕하세요 목이 두꺼운 아침입니다

 오늘만 웃습니다

 

 

 

 <전야제>

 

 폴라의 높이만큼 목이 사라진다 안 열리는 

 뚜껑은 힘을 준 만큼 화가 난다 우산을 써

 도 양말이 젖는다 그러니 오늘 먹은 아침

 을 이해하지 않기로 해 괘종과 LED가 만

 드는 시간이 거의 흡사하다 굳이 따지자면

 삼백만 분의 일 초. 우리 집 개는요 오줌만

 누면요 풀이 죽어요 앞집 남자가 킁킁거리

 며 말한다 산책로는 줄지 않는다 오르골

 소리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회전목마는 돌

 아간다 구멍에 열쇠를 밀어넣는다 비밀을

 만드는 요정들처럼 소리를 삼킨다 말을 참

 으면 혀가 길어질 것만 같아요 침이 고인

 다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파리가 날아다

 닌다 샹송 가수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

 는 노래를 오랫동안 불렀다 아마도 샹송이

 겠지 코로 들어가는 숨을 의식한다 숨쉬기

 가 불편하다 눈을 깜빡인다 아무도 늙지

 못한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 굳

 이 말하자면 삼백만 분의 일 초

 

 미안하지만 오늘은 누군가의 생일이다 

 

 

 

 <이웃집 메머드 씨>

 

 빙하기 이후로 거짓말이라곤 한 적이 없는데 왜 코가 길어지는 걸까요

 우산 없이 소나기를 만나면, 얼음

 멀쩡히 일어나서 지각하는 날엔, 얼음

 가끔 되고 싶은 것보다 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적당히 살아 있고 적당히 죽어갑니다

 토성에서 오셨습니까? 아이슬란드에서 오셨습니까?

 이태원입니까 멀리서도 오셨네요

 이태원에서만 사는 개미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만난다 해도 같은 개미일지 같은 족보의 개미일지 진짜 개미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깨진 발톱이 어떻게 붙을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람에게 입을 빼앗긴 나무들이 서로의 몸을 더듬어 만드는 구조 신호

 내게 필요 없는 얼굴과 내가 필요 없는 세상이 만나 인사를 합니다

 

 이건 참 제 자랑 같지만 저는 한때 괜찮은 포유류였습니다

 흘러넘치는 꿈을 참지 못해 길거리에 오줌을 갈기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지요 방주에는 고래가 타고 사막 낙타가 타고 야근 중이던 김대리가 타고 사막에서 살지 않는 낙타가 타고 방주에는 똥냄새가 진동을 했지요 그때 제일 필요한 건 화장실이었는데

 못 믿으시겠습니까? 당신 개미 아닙니까?

 

 아무도 없는 공터에 아이들이 공을 찹니다 공이 없어도 공은 찹니다 계절은 알아서도 잘 굴러갑니다 폐지 줍던 노파와 눈이 마주칩니다

 인사를 합니다

 아이들이 자기 몸보다 더 큰 겨울을 끌고 갑니다

 이태원입니까 멀리서도 오셨네요 

 

 

 

 <이 시각 주요 뉴스>

 

 매미가 날개를 말리고 있었다

 거리엔 팔짱 낀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어제는 비가 왔었다

 부동산 시장은 계속해서 커지고

 정부는 수목장을 권장했다

 

 A는 올해로 칠 년째 울고 있다 그동안 강아지가 실종되었고 A는 우느라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A의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빗소리가 거세져 A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멜로'라는 말은 '적당한 온도의 눈물'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뻥입니다 애써 줄여놓은 바지통을 다시 뜯어내야 했습니다

 영화가 몇 편 개봉했습니다 네, 멜로입니다

 짖궂어졌습니다

 

 우리는 우울한 날 요가를 하는 사람들

 티비 앞에서 내가 어떤 자세인지도 잊어버리는

 그저 그런 사람들

 

 화성으로 탐사선이 날아갔다 

 지구에 남은 건 이제 부채뿐입니다

 노인들이 많아지고 한때는 노인이라 부르던

 사람들을 노인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탐사선은 한동안 쉬지 않고

 날아갈 것이다

 공원 산책로에는 아직 덜 죽은 매미들이 날개를 비벼 소리를 냈다

 그걸 처음 들은 한 호모 사피엔스는 매미가 '운다'라고 했다

 정부는 여전히 수목장을 권장했다 

 

 

 

 <침 뱉는 개구리들>

 

  테너는 조용하게

  베이스는 음험하게

 

 공연이 끝나야 관객을 의식하지

 우리는 매끄러운 피부야

 우리는 엑스레이를 믿지 않아

 멜로를 믿지 않아

 손가락이 몇 개 더 있었다면

 박수 소리는 조금 달라졌겠지

 

 노래의 어원을 알아?

 새끼 잃은 어미 새의 울음이야

 젤리 가게 앞을 지나쳐 온 아이가 부리는 심술이야

 성욕이야

 아프고 싶은 날에 아프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게 많은 날에는 아무것도 못하게 되고

 비 오는 날에야 우리는 간신히

 저 나무속에는 얼마나 많은 입이 들어있을까

 생각하게 될 거야

 손에 묻지 않는 악수를 할 거야

 

 소프라노는 역겹게

 알토는 잔인하게

 

 코를 훌쩍 거려도 울지 않는

 멜로를 믿어? 공룡을 믿어? 

 

 

 

 <당선 소감>

 

 아침에 문 밖으로 나가서, 저녁에 문 안으로 돌아옵니다. 오늘은 어쨌든 '0'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양말을 신었다가 잘 때는, 양말을 벗습니다. 최후의 나는 나체일 수 있을까요? 태어났을 때는 2.1킬로였다는데, 그 후로 서른 해를 넘긴 지금 이 몸 위에 얹어진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시를 쓸 때면 나는 나에게 가장 성가신 사람입니다. 거울 안에도 핸드폰 액정 속에도 동공의 안과 밖에도 내가 있습니다.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습니다. 나와 얘기하려면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보다 더 많은 관심사가 필요합니다. 금세 피곤해져 발을 씻고 잠에 듭니다. 앞과 뒤가 없는 얘기가 이불 속으로 들어옵니다. 살이 찐 것만 같습니다.

 충분히 오해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착각뿐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겠습니다. 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시간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감각하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어서 일일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사과드립니다. 피곤하시더라도 조금씩만 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사평>

 

 캉캉이 당선된 이유는 문장의 대담함과 사유의 힘이 과장 없이 잘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이미지들이 신선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을 통해 전개되고 있으며 진술 대신 묘사를 통해 심적 상태를 제시하는 요령을 확보한 작품이다. 단 한 편의 높은 완성도가 심사 과정을 마무리지었다. 기대를 안고 축하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