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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우 - 복도 외 5편 (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복도>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 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 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 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 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 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 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비세계>

 

 물컵을 엎어 두었다

 모두 그대로였다

 

 적막이 걸어가고 있었다

 뒤돌아보았다

 

 뼈째로 빠져 나가는 기분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귀가 많은 적막

 파랗게 절여 있는 적막

 

 문을 열면 더 많은

 문을 궁금해하는

 

 적막의 행방은?

 

 아직도

 문을 기다리는 것 같다 

 

 바깥의 행방은?

 

 깨진 양파처럼 누가

 차버리는 것 같다

 

 짓무른 눈을 붙들고

 지워지는 몸

 

 물컵을 세워 두었다

 아직 그대로였다

 

 침대는 눅눅하고

 누가 뚜껑을 열어 둔 것일까

 미끈거리는데

 

 물고기가 살지 않는 어항 속이다

 

 적막이 귀를 닫는다

 문을 연다

 

 나는 자갈을 문다

 여기보다 깊은 바닥이 있다 

 

 

 

 <잠>

 

 빠르게 지나간다 육신을 두드려 놓고 떠나온다 허공을 헤매는데, 묶어 줄 사람 어디, 없나 살아 있는 거라곤 나밖에 없나 육신을 바라본다 저건 나의 것이었나... 정말, 내가 견뎌 온 것이었나 저 육신을 향해야 한다 이것을 영원한 헤엄이라고 하자 공기가 흐르고 벽이 흐르고 이 밤은 저 육신 속으로 흘러드는데 나는... 언제 도착하나 어두운 풍경처럼 깊어만 가나 전등이, 눈물만 한 빛을 낳는다 형체 속으로 침입한다 나만, 지구의 배치처럼 돌고 있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밤 내가, 감당해야 하는 밤 허공은 창백하다 그래서, 이것은 창백한 꿈인가 해산해 버린, 누군가 버려놓은 메아리인가

 서로가 서로를 물고 늘어지는 잠 나는 가야 하는가 저 속으로, 파고들어야 하는가 마침내 떠나보내야, 살아 있을 수 있는가

 

 

 

 <이건>

 

 달린다 아주 길게, 입술이 파래진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항상 느려서 버스를 탄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도착지는 멀다 거기서 내가 나를 기다린다 병신처럼, 묻지 않는다 운다 손톱을 물어뜯는다 피가 나온다 검은 피, 심장은 오른쪽에서 뛰고 있다 끈적한 피, 채혈실에 들어갔던 적 있다 아무도 찾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기분, 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손목을 여러 번 긋고 피를 쏟는다 창백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어때, 괜찮아? 여전히 달리고 있다 운명은 내 몫이 아니다 계단을 오르고 누군가를 불러 세운다 내 얼굴을 한 그 사람과 몸을 맞바꾼다면? 그런데 못 버티면 어쩌나? 내가 나를 버거워한다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 길목마다 피를 흘려 놓았다 거기서 이파리가 돋아난다 아주 까맣게, 이건 운명이다 

 

 

 

 <피카부>

 

 냉장고를 연다 너가 열린다 살아 있다 꽁꽁 얼어붙어 있다 머리카락이 한가득 너의 입에 물려 있다, 이름은 수챗구멍 괜찮겠니?

 

 냉장고를 닫는다 너가 닫힌다 나는 문고리에 매달려 냉기를 빨아먹는다 나도 차가워질 수 있을까 때론 이성적인 사람처럼, 천천히

 

 냉장고를 연다 너가 열리지 않는다 쭈그려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 속엔 무엇이 있니 내 비밀이 거기에 적혀 있을 것 같다 너 옆에 앉고 싶다

 

 냉장고를 닫는다 너는 그대로인데, 내가 동상처럼 차가워진다 너를 닮고 있다 이성적인 사람? 이상적인 사람? 너가 버려 둔 책을 주워 읽고 있다 너의 일기였구나, 내 이야기를 가득 담아 두었구나

 

 냉장고를 연다 너가 열린다 너 속엔 내 해골이 잔뜩 쌓여 있다 머리카락과 고민이 뒤엉켜 있다 싹이 자라나 있다 깃발처럼 내 영역을 다져놓았다 너 안에 들어가고 싶다

 

 나를 연다 냉장고가 열린다

 

 

 

 <햄버거 병>

 

 앉는다 눕는다 오호라, 자연스럽다 침대가 내 위에 눕는다 아버지가 눕고 어머니와 누나가 따라 눕는다 나는 계단을 올라간 적이 있었던가 치마 입은 소년을 만나 아이스케키를 하고 도망갔던가 포개지는 건 이불의 감정이거나 페티의 감정... 푹신하다 푹신해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아들아 힘드니? 버틸 만해요 내가 버티는 건 계단인가 어릴 적 자꾸만 늘어지던 계단... 일가족은 철제 계단처럼, 침을 흘린다 내 얼굴로 쏟아진다 일종의 바비큐 소스처럼, 그날엔 비가 왔었던가 빗속에서 입술이 질린 소년을 보았던가 동생아 힘드니? 버틸 만해 가족 사진이 방문을 열어 본다 생존을 목격하고 문 닫는다 그러자 지구가 눕는다 나는 왜 편안한가 스토브나 냉장고가 아닌, 지구가 대자로 뻗어 있다 입안에 미끈하게 장화가 씹히며 생각난 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소년, 우산도 없이 다리를 부둥켜안고 기다리던 소년, 맥딜리버리가 스키드마크처럼 웃었던가 아들아 힘드니? 버틸 만해요 대답했던가

 

 

 

 <당선 소감>

 

 어둡고 축축한 시간을 지나오다, 등단 소식을 들은 건, 서점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만, 맨바닥에 널브러졌습니다. 오래 달린 사람처럼, 다리가 무거웠습니다. 영혼을 거울 속에 박제해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거기에 두고 왔을까, 질문을 업고 방에 들어왔는데, 책상에 엎질러진 진통제 상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모서리들이 나를 지나다니는 것 같은 기분. 자꾸만 아팠습니다. 더 쓸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진통제를 깨물어 먹으며 빈 몸으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이게, 내 전부인 것처럼. 내 몸을 횡단하는 무수한 알약과 슬픔을 사랑할 각오입니다.

 아, 책 몇 권과 영혼을 데리러 어느 날, 서점에 가 볼 작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이런 점들을 세세히 검토하며 변선우 씨의 복도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우선 응모한 작품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역량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 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 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 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변선우 씨에게 축하의 악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