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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 - 최초의 정의 지금,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며 아무라비족의 벽화 같은 것이며 유통기한은 물론 공소시효나 소멸시효 따위도 존재치 않는 예수와 붓다의 경전보다 더 숭고한 진실의 언어이다 이러한 것에 관해 새와 풀꽃과 우물과 물푸레나무와 아름다운 비단뱀에게조차 나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진실에 관해 사유하지 않더라도 침대 위에서의 사랑과 생리현상의 해결과 블랙커피를 음미하는 것과 무협지를 읽는 것엔 하등의 지장이 없다 노을 속에서 개와 유유히 산책하는 것과 샛노란 은행잎 사박사박 떨어지는 가을을 감상하는 것에도 장애가 없다 그대가 속한 제국은 호흡을 멈추기 직전까지도 그대를 참으로 정의롭고 공정하게 대할 것이다 혹여, 그대 별자리가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면 사후까지도 제국으로부터 은혜로운 다스림을 받기..
안민 - 스노우 볼 국경도시 위로 궤도를 이탈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몸은 욕망과 순수만이 혼재되었을 뿐이다. 구원없이 작곡된 레퀴엠처럼. 내상을 입고 피 흘리는 눈동자 곁, 흰 꽃들이 수북하게 피어 있었다. 계절을 지운 식물의 비밀에 관해 염려하지 않았다. 이국의 음률로 채색된 불빛들, 좌표를 잃은 것도 그곳에 흘러든 것도 포즈에 불과했다. 허공의 방, 밀폐 내부의 또 다른 밀폐. 기억하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처음이 적주 속에 담겨 일렁거렸다. 한 번도 의지로 겨울을 설계한 적 없어요. 월경한 이들에 의해 엎질러진 풍경, 다친 꽃은 여전히 줄기 속을 흐르며 욕망했지만 태엽은 통증을 감고 있었고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고 음악이 다 풀리면 태엽이 멈춰야 했지만 그녀는 금세 녹아버릴 눈꽃 모양 위태했다. 흐린 날 눈빛..
안민 - 모래시계 그러니까 이건 난해한 스토리다 시간이 감금된다는 것, 지평선이 허물어진다는 것, 아무리 버둥거려도 네 안에선 꽃이 피지 않는다 믿기지 않겠지만 네 운명은 사막을 견디는 것, 주위를 돌아봐도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데 너는 수북했겠지 전생에선 낙타와 은빛 여우가 네 심장에 고독 같은 족적을 남겼겠지 뿌옇게 흩날리는 허구들, 그건 너인 동시에 나였다 그즈음 거대한 언덕이 또 다른 너와 나로 분열되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불가해한 지대에서 바람의 몸을 빌려 이곳에 갇혔다 그리고 윤회, 이제 더는 세포분열이 없을 것인가 그러나 네가 속한 이곳도 블랙홀, 네 원적에선 아직도 푸른 두건을 두른 자들이 몸을 횡단하겠지만 이곳에선 알몸의 인구들이 네 몸을 횡단한다 너는 죄명도 없이 유죄다 눈들이 헉헉거리며 너를 가늠한..
안민 - 사춘기에서 그 다음 절기까지 -1 총신 끝에서 새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하얀 기폭, 눈부신 소녀의 허벅지, 너는 총구가 식어 서부 대신 동부로 갔고 소년은 총구가 부끄러워 제 안을 맴돈다 불온한 사랑처럼 십자가 위로 젖은 눈이 꽂히는데 너는 퀴어도 아니면서 총을 만졌고 소년의 총은 구멍 없이 더웠다 자위적인 태도와 그림자 없는 형상으로 들켜버린 아름다운 치부, -2 조숙과 미숙에서 밤은 혼미했고 근친이 구약에 혼숙하고 있음을 알아챈 소년이 자신의 신을 바다에 버렸다 붉은 바람이 불어왔고 소년은 네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로 개종하였던가 몸 안 깊은 골짝까지 뜨거운 눈보라 흩날리고 너는 사라졌다 죄지은 손과 함께 신을 걸어두고 네가 방언을 한다 누군가는 그걸 발견이라고 명명한다 머나먼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여전히 네 총은 소년의 총과 흡사하고..
안민 - 당신을 향해 달리는 당신 마라톤 평원을 달리고 있는 당신, 페르시아에 속해 있습니까? 아테네에 속해 있습니까? 당신은 아름다운 전령입니다 발이 사뿐사뿐 뒤통수를 쫓고 있습니다 개에게서 호흡을 배워 당신은 달리고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그리하여 멀어지고 있습니다 숲으로부터 나로부터 몰락을 둘러업고 낙타처럼 느리게 혹은 치타처럼 빠르게 몸이 몸을 밀고 나아갑니다 당신을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몸을 거쳐야 했습니까 그림자도 결별이 있다고 하였나요? 나도 그림자를 베어내고 떠나려 했는데 여전히 숲에 머물고 있습니다 당신의 들숨과 날숨을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안나처럼... 지금은 숲에 화살 같은 비가 내립니다 액자 안엔 고갱의 자식들이 오버페이스를 합니다 모든 입이 당신과 내가 관계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어요 내 음악은 오..
안민 - 나와 나의 분인과 겨울에 갇히던 공포는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었고 내 뿌리 끝에는 눈동자가 있었다 윤리에 감금된 눈동자가 떨릴 때 일곱 개의 눈동자 속으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 파사국과 다섯 형제든 여섯 형제든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만 삼는 사율국에서도 태양이 쓰러지고 겨울이 스며들었다 토화라국과 계빈국과 범인국에서도 그러했다 그즈음 나는 내 분인과 설산을 넘고 있었다 분인은 피에타에 등장한 남자이기도 올드보이 안쪽의 외로운 타자이기도 소설 [서드] 속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아, 피에타 아바타 아미타불의 날들이여 그러므로 나는 하나에서 출발하여 여러 개로 설산을 넘었고 눈이 펑펑 내렸고 아내는 둘이 되었다가 넷이 되기도 했는데 서로의 목에 밧줄을 걸었고 흰 피가 결빙되고 있었다 다시 밤눈이 내리자 아내는 두 개의 화분으로..
우남정 - 돋보기의 공식 외 5편 (2018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 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 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 본다 찡그려 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본다 눈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
박신우 -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외 5편 (2019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별이 깃든 방, 연구진들이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별 가운데 가장 크기가 작은 별을 발견했습니다 그 크기는 목성보다 작고 토성보다 약간 큰 정도로, 지구 열 개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라더군요 세상에 정말 작군요, 옥탑방에서 생각했어요 이런 작고 조밀한 별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말이죠 핵융합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표면은 극히 어둡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늘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이 별의 천장은 매우 낮습니다 산소가 희박하죠 멀리서 보는 야경은 아름다울지 몰라요 어차피 낮에는 하늘로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먼지가 이만큼이나 모이니 질량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겠군요 그건 괜찮은 발견이에요 먼 곳에서 별에 대해 말하면 안 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중력을 연구하지는 말아야죠 피아노 두드리듯 논문을 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