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의 공식>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 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 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 본다 찡그려 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본다
눈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죽은 발톱>
무엇에 걸려 뒤집히는 비명, 눈물이 쏙 빠진다
뽑히다 만 뿌리
살갗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
온종일 발품을 팔다 지쳐 돌아온 날
피멍 삼킨 그 발톱이다
가만, 그 밑에 보드라운 무엇이 있다
고물고물 숨죽인
보얗고 여린 꽃잎 한 장
반달 같은 발톱에 새순이 돋았나
들뜬 보굿을 밀어올리고 있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 이야기
한겨울 개울가
곰 한 마리 발견한 사냥꾼, 활을 쏘았대
곰이 그대로 서 있더래
다시 활을 쐈는데 그대로 서 있더래
가까이 가 보니
어미 곰은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죽어 있었더래
그 밑에 새끼 두 마리 곰실곰실 먹이를 찾고 있었대
죽어서도 덜컹거리며 기다리고 있었구나
눈을 질끈 감고 죽은 발톱을 뽑아 낸다
자줏빛 등이 품고 있던
어린것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세상을 지켜낸 힘은 저 묵묵한 마중에 있었다
<꽃의 순장>
묵은 상자의 먼지를 털어 내고, 꺼낸 시집을 펼친다
차마 너를 꺾어 품던 날
백팔 페이지 책갈피에 꽃무덤이 생겼다
한 줌의 가을과 함께 나의 사랑도 잠들었다
삼킨 향기 목에 걸린 채
종이와 꽃이 서로 껴묻고 환생을 꿈꾸고 있는지
함축과 은유, 생략을 지나 낯설게
밤을 건너온 새벽이 번져 있다
밀봉된 자신을 어찌 다스렸는가, 꽃이여
아득한 제 몸에 흐르던 실핏줄
시즙마저 향기로워, 다투어 활자들이 제 몸을 적셨을까
저 갈피에 잦아든 울음
색이 날아간 자리에 한 마디 절명사를 남겨 놓았나
적막 한 편을 낭송한다
문항한 여백이 바스락거리는 기척
바싹 마른 날개
바람에 묻어 온 햇살을 털고 있다
산부전나비 무늬에서 쑥부쟁이 향이 날아온다
<풀물이 드는 오후>
발동기가 괴성을 지르고 있다
공원 구석구석 풀숲을 헤집고 있는
노란 작업복 사내의 등에서 파란 점액질이 출렁거린다
이름을 물어보고 근황을 챙길 겨를도 없다
씨앗을 맺은 꽃대가 쓰러지고
넌출 밑동이 잘려나가고
풀 보라 비릿하게, 허공에 풀물이 든다
모자 깊이 눌러 쓰고 얼굴을 가린 채
종종 멈춰 서서 범벅이 된 풀 조각 털어 내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서 절삭유 냄새가 진동한다
풀 . 풀 . 풀
뜨거운 단말마 속으로 기울어지는 해
죽음이 향긋하지 않느냐고
벌겋게 핏물 밴 서녘을 꿀꺽 삼킨다
초록은 잠시 눈을 떨군 채 발등을 바라본다
처서를 지나가는
질긴 그것들,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풀 . 풀 . 풀
담배를 빼어 문 사내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피닉스 호스텔>
몸은 아침인데, 밖은 한밤중이다
겨울 스카프 한 장 거적삼아 머리맡을 가린 채
12인실 어둠 속에 꼼짝없이 누워 있다
위엔 불어를 쓰는 뚱뚱한 여자, 아래 아랍계 남자를 언뜻 보았을 뿐
어긋난 시차는 어디를 떠도는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툰드라 숲을 날아오르는 오로라를 찾아 떠났는가
유성이 쏟아지는 우주 정거장에서 누구를 기다리는가
코 고는 소리조차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던가
파하... 막혔다 터지는 파열음, 집어삼키는 낮은 신음 소리, 긁히듯 떨리는 창문, 커졌다 작아지는 간헐적 기침, 어둠을 쪼아 대는 새 울음 스타카토, 그리고 점점 세게, 주술 같은 잠꼬대, 바람 가르는 날갯짓
다른 꿈이 내는 숨소리가 묘한 하모니를 이루는 밤
누가 삐걱거리며 사다리를 내려와 더듬더듬 문을 찾는지
배낭과 옷가지들의 그림자에서
불길이 솟구친다
낯선 동굴 피닉스 호스텔이여
겨드랑에서 들숨과 날숨이 새어 나오는
불꽃처럼 파닥거리는 이 몸은 또 다른 나의 아침이다
콘센트에 매달린 붉은 플래시가 번쩍 나를 바라보는
<몽유>
창가에 머리를 두고 잠든다 머리카락이 흥건히 엎질러진다 아이비의 넝쿨이 길이를 못 이겨 구부렁구부렁 흘러나오고, 눅눅한 바람이 창가로 뻗은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똑, 똑, 똑 물방울이 노크하는 소리 능소화 꽃가루에 눈 먼 허공이 13층을 내려간다
발등에 눈이 돋는다 무엇을 잃어버렸나 공원에는 아무도 없다 물가 버드나무 그네가 매듭을 풀려고 몸을 뒤틀고, 낭미초에 뛰어내릴 듯 시선이 휘어져 있다 찢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있는 거미줄 물안개가 사린 꼬리를 풀며, 천천히 유수지 갈대밭을 기어 나오고 있다
아프다... 아프다 아니 아프고 싶은 아프지도 않는, 살아 욕스러운 몸뚱이가 번들거린다 감긴다... 저 차갑고 섬뜩한 것, 서서히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조여 온다 길에 몸을 비비며 질주하는 찻소리, 새 한 마리 푸드덕거린다
베갯잇에 떨어진 머리핀, 젖은 뺨에 패인 자국이 깊다
<당선 소감>
그날,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지만 어느 늦깎이 소설가의 출판 기념식 참석차 공주에 가 있었다. 기대와 우려가 폭설이 되어 정처 없이 한옥 마을을 덮는 밤. 절절 끓는 구들장에 풀어 놓았던 몸을 추스리며 길을 나서고 있었다.
온고지신의 의미는 사라지고 있다. 구태의연한 말씀은 재미없다. 더 신선하고 더 창의적이고 더 발랄하고 더 엉뚱한 것을 즐긴다. 새로운 물건들, 새로운 언어들, 새로운 상상들이 차고 넘친다. 오래된 것들이 빛을 잃는다. 앞으로 걸어가는데도 자꾸 뒤로 밀리는 것 같은 속도,
"할 수 있을까?" 막막한 물음에 대한 회신이 도착했다. 내 손을 들어준 심사위원님께 무한한 감사들 드리고 싶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처럼 자기가 기다리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 오고 있는, 그러나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돌아보면 국어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소녀 시절부터, 지독한 페미니스트로 이 땅의 딸과 어머니로 살아낸 날들 속에도 면면이 오고 있었을, 지금도 오고 있고 앞으로도 오고 있을,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오랜 희망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자신을 불태우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신화의 새처럼, 뼛속 깊이 새겨진 구태를 벗겨 내는 일은 더디고 혹독했다. 기쁘다. 자고 일어나도 기쁘다. 이 기쁨이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를 지켜주기를 기도한다. 나의 당선이 누구에간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심사평>
당선자는 돋보기의 공식 외 4편을 응모한 우남정 씨다. 그의 응모작 중 죽은 발톱은 섬세하고 적확한 묘사로 이야기를 끌어 가며 탄탄한 구조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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