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 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5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 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 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환기를 시킬수록 쌓이는 것들에 대하여>
한라봉 입술엔 쌓인 것들이 많다
나도 그 위에 함께 쌓여 있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렇게 쌓여 있을 것이다
겹쳐 있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한동안, 이라는 기간이 좋은 것이니까
수건은 젖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데
불은 자기를 흔들었던 초의 색을 기억한데
발전은 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한데
영원히, 라는 거 말고
잠깐 머무는 것에 대해 생각해
전화가 오면 수화기에 대고
좋은 사람이랑 같이 있다고 말해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자랑해
손금을 따라 흐르던 바람의 색이 변하면
그때부터 비를 기다려
기다리다가 손바닥에 비가 찾아오면
손바닥의 온도로 인해 미지근해질 거야
사람들이 그러하듯 말이야
외로움은 커질수록 두꺼워지는 것이 아니라
얇아진다고 했어
때려치우고 싶은 인연
이미 친해진 사람들 중에 있지
고르지 말고 익숙한 것들을 먼저 없애
편하지 않고 낯선 것들을 남겨
얇은 외로움을 유지해
모든 떠올리기 싫어해 봐
아까운 게 아니야
없애고 없애도
청소하다가 가끔 발견되고 그래
<필 꽃 핀 꽃 진 꽃>
봄에 태어났으니 봄에만 살면 좋을 것 같아서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는 섬으로 이사를 갔다
바다 한가운데 놓인 화분 같은 섬이었다
수국 옆에 집을 구한 것을 시작으로
때가 되면
부용 옆으로 동백 옆으로 갈대 옆으로
주황 곁으로 파도 사이로 이사를 갔다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곳이면
일 년 내내 봄일 거라 생각했으나 살아 보니
녹아 내리다가 우연히 시원했고
얼어붙다가 따뜻한 기운이 한두 번 찰랑였다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시들어 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고 생각하기를 멈췄다
필 꽃 안으로 빠져나가듯 들어가 밥을 먹었다
숨이 멎을 것처럼 안전했다 안전은 잠시뿐이었다
핀 꽃 위에서 포만감이
미끄러지듯 내려왔고 소화를 시키려
진 꽃
을 손에 들고
버리러 갔더니,
버리고 와서야 알았다
<누워서 등으로 섬을 만지는 시간>
빨래를 하려고 일어났다가 오랜만에 쏟았다
내가 하도 울어서 바다가 생겼다
멍든 물을 뒤지다가 바람을 쓰러뜨렸다
파도도 내가 그랬다
온통 평상인 섬에서
마음을 들키며 살고 있었다
향기 없이 무게만 남은 것들을 모아
무너진 가방 속에 막내처럼 넣어 두는 일을 하였다
향기가 없는데도 가방에 잘 담겨서 쉬운 일이었다
평상에 누워 전신을 떨 때면
구겨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늘 땀도 조금씩 났는데 한국식 땀은 아니었다
혼자인 모습을 바지 추켜올리듯 추켜올렸다
하루 종일 숨어 지낸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밖엘 나갔고 누군갈 만났지만 말을 별로 하지 않았으니
숨어 지냈다고 할 수 있겠다
음악이 입을 다무는
저녁 7시
눈에 경련이 왔고
한 사람의 얼굴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나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섬의 뿌리를 파먹었다
나방을 먹는 느낌이었다
저녁 7시
섬은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해의 동선>
만물이 솟아나는 동쪽에서 해가 지는 서쪽으로 옮겨가는 일은 내게 버거웠어요 남이 운전해 주는 버스를 타고 가도 땀을 흘려야 했지요 서귀포 표선의 한 정거장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자의 부축을 받고 버스에 올라탄 할머니가 한 분 계셨어요 버스 기사님은 할머니에게 거동도 힘들면서 외출은 무슨 외출이냐고 할머니를 나무랐어요 나는 나만 그 말에 아픈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았는데 버스가 얼마쯤 달렸을까, 휴대폰도 없는 할머니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할머니의 옆 좌석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가 버스 기사님에게 소리쳤어요 주무시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소변을 흘린다고 이상하다고, 버스를 세우고 할머니를 흔들던, 흔들던 버스 기사님이 119에 전화를 했어요 의식이 없다고 멈추신 거 같다고, 구급대원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끊지 말라고 말 잘 들으라고 했어요 버스 기사님은 말 잘 들으려고 할머니를 좌석과 좌석 사이 통로에 눕히고는 가슴 부위를 압박했어요 숨아 돌아오라고 돌아오라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구급대원이 할머니의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할머니의 현재 얼굴색이 무슨 색이냐고 물었어요 버스 기사님은 할머니의 얼굴이 워낙 거메서, 하얀지 노란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나는 외쳤어요 하얗다고, 나만 들리게 속으로 외쳤어요 만물이 솟아나는 곳의 반대편은 결실이라고
<당선 소감>
한 사람보다 한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난겨울, 저는 네팔에 있었어요. 바람이 시작되는 곳 묵티나트에서 포카라까지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야크를 키우는 집에 들어가 질 좋은 치즈를 사 먹기도 하고 11월에 핀 꽃들을 구경하면서 걷는 여행이었죠.
매일 산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마지막 날이었을 거예요. 길을 안내해 주던 네팔인 수잔이 일행 모두를 불러 세웠어요. 수잔은 5분 뒤에 재미있는 것을 알려 줄 테니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주우라고 했어요. 우리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돌을 하나씩 주웠습니다.
5분 후 도착한 곳은 경사가 가팔라 사람이 내려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저 멀리에 반토막난 나무가 있었고 댕강 잘려 나간 평평해진 부분에는 여러 크기의 돌들이 쌓여 있었답니다. 수잔은 돌을 던져서 그 부분에 안착시키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들은 차례차례 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그중 저만 안착에 성공. 그대로 눈을 감고 시인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네팔의 좋은 기운 덕분이었을까요. 오늘부터는 제가 쓴 시를 더 이상 혼자만 읽지 않아도 되네요.
이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서 며칠간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제주에서 김포를 오가는 비행기를 몇 번 탔어야 했는데요. 그 안에서 잔뜩 겁을 먹어야 했답니다. 이 멋진 소식을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는데 비행기가 추락해버릴까 봐서요. 만약 추락한다면 휴대폰의 비행 모드를 해제시키고 몇몇 사람들에게 나의 당선 소식을 반드시 알리고 죽으리라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시를 위해 제주에 머물 것 같아요. 가끔씩 제주가 아닌 곳에 다녀오고 싶을 땐 기꺼이 다녀올 거고요. 그곳이 동남아든 유럽이든, 어디든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낯선 것들이 풍부한 공간에 있어야, 제게 시가 오기 때문입니다.
<심사평>
우리는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외 4편을 만장일치로 꼽았다.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였다.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 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 보게도 만드는 시였다. 그 어떤 이견 없이 심사위원 모두의 의견이 한데 모아진 데서 오는 즐거운 불안 말고는 아낄 박수와 격려가 없는 시였다. 앞으로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의 유쾌한 행보를 설렘으로 좇아 볼 예정이다.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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