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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 - 고양이 무덤 내 고양이가 죽으면 어떤 무덤을 만들어줄까 밤은 길고 낮은 멀리 있으니까 죽은 자들의 무덤은 너무 좁고 산 자들의 재앙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넓다 매일 밤을 사라지지 않으려고 뼛속까지 버텼어 언젠가는 화장터 앞 벤치에 앉아 오래 하루를 보냈다 말할 수 없는 이유들을 잊으려 이유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검은 사람들이 나를 지워줄 때까지 단풍은 붉고 푸르고 흔들린다 갈라진 심장을 가진 자는 자꾸만 뒤를 본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유언으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죽은 자들은 견딜 수 있을까 고양이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밤의 울음을 길게 운다 망각이 자라는 자리에는 풀 두어 포기 밤새 팽이는 돌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른다
박은정 - 복화술사 하차투리안 외 4편 (2010 시인세계 신인상) 하차투리안은 네모난 박스를 들고 유랑을 한다 왈츠를 추듯 우거진 정글을 가볍게 턴을 하고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단숨에 기억해내는 유연함 하차투리안은 단련되어간다 침묵으로 만든 꽃다발을 창에 걸고 무수히 오르내리는 밤들처럼 앞발을 들고 하차투리안 네모난 박스는 죽은 인형들의 집합체 입을 열면 비가 내리고 온 강이 범람하고 떠내려간 사람들은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온다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정은 말문이 막힌 표정 그러니까 슬프고 발랄한 침묵으로 오늘은 아주 이상한 일들이 많은 날일 테니까 정오가 되면 하차투리안은 이불을 말고 흔들의자에 기대 낮잠을 잤다 귀가 먼 부랑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우리의 전사 하차투리안 당신은 우리의 복화술사 당신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매일매일 비밀을..
안병호 - 뼈의 기원 (2010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문득, 뼈가 시려오면 내 뼈의 아득한 시원을 찾아 눈과 바람의 길을 걸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이 대체로 나의 문명이지만 그것은 비석에 판각되거나 정의되어진 것만이 아닌 단단한 그 무엇이 내 속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말 속에도 뼈가 있다하고 문중의 아재 한 분은 바람조차 투명한 뼈를 지니고 있다하므로 뼈는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모든 족속은 그 조상으로부터 몇 개의 맑고 흰 뼈를 물려받아 사는 동안 또 한 생이 고요히 마감되는 것이다 "뼈가 시릴 적엔 몇 모금 음복술로 덥히면서 오백년 전, 통정대부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삼십대에 무슨 사화로 졸하신 당신, 처자식은 관노가 되고 그 때 당신의 눈물은 눈발이 되어 사방 백리까지 날렸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뼈마디마다..
김현 - 형들의 사랑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죽은 생선을 구워 먹고 살아남기도 하는 사이니까요 허나 형들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 그들의 인생이 또한 겨울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는 것이며 그들의 인생이 또한 영혼의 궁둥이에 붙은 낙엽을 떼어주는 것이며 그들의 인생이 또한 자식새끼 키워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속 깊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형들의 사랑을 보세요 점심에 하기 싫으면 저녁 먹고 하자 당신에게 말하고 노래하며 살구를 씻었습니다 기다려 내 몸을 둘러싼 안개 헤치고 투명한 모습으로 네 앞에 설 때까지 살구를 깨물고 과실 속에서 튀어나온 아내라는 시를 윤문하였습니다 여름비 잠시 멈춤 어제 본 아내의 내면은 주먹과 보자기 아내는 미나릿과에 속하는 얼굴로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웠습니다 ..
김현 - 성탄 전야 아이는 개를 끌고 아픈 사람을 생각하며 걸었다 걷는데 개가 자꾸 짖어대는 통에 개새끼야 조용히 좀 해 아이는 말해버리고 말았다 아이를 올려다보는 개의 콧잔등에 눈이 내려앉았다 개는 또 짖었다 희디희게 짖었다 개새끼 아이는 개를 쓰다듬어주고는 아픈 사람에게 줄 눈송이를 깊고 검은 곳에 담았다 엄마는 만두를 좋아해 평화로운 사람 아이는 개를 끌고 가다가도 멈칫 저 아래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흘러가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인간사인 줄도 모르고 아이는 냄새 맡고 아픈 것들을 생각했다 욕하는 나의 마음 개는 아이를 끌고 가다가도 멈칫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네발을 내려놓았다 그것이 인간사 성당 앞을 지날 때 아이는 남자 둘이 손을 꼭 잡는 것을 보았고 왼편에 선 사람이 아픈 사람이구나 알아들을 수..
김현 - 블루 당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던 화가는 블루가 자신을 구한다고 믿었다 이제 와 보니 그 병은 에이즈였다 에이즈에 걸린 화가는 자신의 몸을 캔버스로 삼았다 낮에도 밤에도 그의 몸은 한없이 블루 그럴수록 몸에서는 검붉은 반점이 딱딱 피어오르고 그럴수록 그는 더 한정 없이 블루 사람들은 그에게 점점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 블루가 자네를 살아 있게 하는군 그는 무명에서 벗어나 전위적인 예술가로 불렸다 피를 토하고 그 평화가 블루 속으로 침투할 때마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죽었다 블루 속에서 블루로 뒤엉킨 욕조 안에서 블루로 뒤덮인 궁둥이와 목선과 뒤통수 블루가 흘러넘쳐서 온 집안이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뒤집어 들것에 싣고 나갔다 새파란 눈동자로군 아주 새파란 눈동자야 그는 멀기도 하고 알 수도 없는 ..
김현 - 가장 큰 행복 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꿈은 참 길지요 어제는 치킨뱅이에서 회식을 하였는데 이사님을 향한 나의 손가락 하트 노래방에서 갑자기 늙어버렸다는 생각 택시를 탔다가 내렸다가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수가 적어졌지요 당신은 목욕하고 내게 꿈 깨라 하지 않고 앞니가 아파서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을 들려주고 밥통에 밥이 다 말라서 먹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우린 아직 젊고 버려질 수 없기에 당신의 앞니를 걱정했습니다 일어나 당신과 마트에 가서 밥 사 먹고 매대에 놓인 팬티를 사서 커플 팬티로 삼자 순두부와 가자미와 영양부추를 사 왔지요 남자들에게도 평범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고 잠들기 전까지 나는 유대인이었고 그는 동성애자였다 옛날 소설을 읽어야지 하다가 우린 섹스..
김현 - 겨울은 따뜻한 과일이다 그녀는 아빠가 되는 삶을 꿈꾸었다 아빠란 모름지기 가정으로 과일을 가져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란 모름지기 겸손한 아버지 그녀는 오렌지 한 개를 사 들고 간다 전기도 없고 물도 없는 단란한 가정으로 고향에서 소젖을 짜던 부모와 선산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을 생각하며 그녀는 식탁 위에 쌓인 것을 본다 오래전부터 뼈와 살 먹을 게 없어서 이런 걸 아내가 그녀에게 다가와 짧은 삶을 속삭인다 발은 시리고 걸레질하다가 슬픔에게 손을 내밀고 잡아먹었어 오렌지는 따뜻한 과일일까 차가운 과일일까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아내의 무덤 같은 배에 입술을 붙이고 믿음을 권한다 오렌지는 따뜻한 과일이다 그녀와 아내도 한때 작은 손과 발을, 부모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녀들은 참정권을 가졌다 저 흉한 걸 치워버리자 그녀가 올려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