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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 블루

 

호시절:김현 시집, 창비 아무튼 스웨터:올해 서울의 첫 스웨터는 언제 관측되었을까?, 제철소 입술을 열면 걱정 말고 다녀와:켄 로치에게, 알마 문학과지성사 글로리홀 - 김현 시집, 단품

 

 

 당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던 화가는

 블루가 자신을 구한다고 믿었다

 

 이제 와 보니 그 병은

 에이즈였다

 

 에이즈에 걸린 화가는

 자신의 몸을 캔버스로 삼았다

 

 낮에도 밤에도

 그의 몸은 한없이 블루

 그럴수록 몸에서는 검붉은 반점이 딱딱 피어오르고

 그럴수록 그는 더 한정 없이 블루

 사람들은 그에게 점점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

 

 블루가 자네를 살아 있게 하는군

 그는 무명에서 벗어나

 전위적인 예술가로 불렸다 

 피를 토하고

 그 평화가

 블루 속으로 침투할 때마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죽었다

 

 블루 속에서

 블루로 뒤엉킨 욕조 안에서

 블루로 뒤덮인 궁둥이와 목선과 뒤통수

 블루가 흘러넘쳐서 온 집안이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뒤집어

 들것에 싣고 나갔다

 

 새파란 눈동자로군

 아주 새파란 눈동자야

 

 그는 멀기도 하고

 알 수도 없는

 검은 곳에 묻혔다

 

 그의 자화상들만이

 가깝기도 가깝고

 알 수도 있는 밝은 곳에 걸렸다

 그는 산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눈을 감을 때도 되었는데

 자꾸만 눈을 감았다

 떴다

 

 세계가 이토록 파란 것이었다니

 

 그와 눈빛을 주고받은 적 없는 비평가들이

 그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했다

 그를 버렸던 사람이

 그의 일기장을 구해 와 돈 받고 팔았다 

 

 아무도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

 한 사람만이

 그와 눈을 맞췄다

 블루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질병을 발견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은빛 동전을 그들 손에 쥐여주고

 일기장을 품에 안고 나와

 새파랗게 추운 거리를 가로질러

 눈보라 속

 집으로 갔다

 추위와 굶주림과 기쁨이 기다리는

 계단을 쓸고 닦고

 

 블루

 블루

 블루

 한밤

 

 그의 모든 자화상이

 동시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오직 한 예술가만이

 빗자루를 세워두고

 품에서 일기장을 꺼내

 기록해두었다

 

 먼 훗날

 그도 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이름이

 그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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