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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 가장 큰 행복

 

호시절:김현 시집, 창비 아무튼 스웨터:올해 서울의 첫 스웨터는 언제 관측되었을까?, 제철소 입술을 열면 걱정 말고 다녀와:켄 로치에게, 알마 문학과지성사 글로리홀 - 김현 시집, 단품

 

 

 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꿈은 참 길지요

 

 어제는 치킨뱅이에서 회식을 하였는데

 이사님을 향한 나의

 손가락 하트

 노래방에서 갑자기 늙어버렸다는 생각

 택시를 탔다가 내렸다가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수가 적어졌지요

 

 당신은

 목욕하고

 내게 꿈 깨라 하지 않고

 앞니가 아파서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을 들려주고

 밥통에 밥이 다 말라서 먹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우린 아직 젊고

 버려질 수 없기에

 당신의 앞니를 걱정했습니다

 

 일어나

 당신과 마트에 가서 밥 사 먹고

 매대에 놓인 팬티를 사서 커플 팬티로 삼자

 순두부와 가자미와 영양부추를 사 왔지요

 

 남자들에게도

 평범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고

 

 잠들기 전까지

 나는 유대인이었고 그는 동성애자였다

 옛날 소설을 읽어야지 하다가

 우린 섹스 할까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금이 간 건 깨지기 마련

 

 초복은 내일모레이고

 당신은 삼계탕도 먹을 수 없는데

 그제야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가는 빗방울이

 밤의 실금처럼 보였습니다

 

 힘없는 당신에게

 어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나는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관해 조잘거리고

 당신의 힘을 기다리다가

 꾸벅꾸벅 꿈이 들이쳐서

 창을 닫고 잠이 들었습니다

 

 멀리 있나요

 거긴 괜찮나요 

 

 이곳에서는

 백순두부탕이 끓고

 밀가루 묻힌 가자미를 기름에 지지는 소리

 부추에 멸치액젓 한 큰 수픈 고춧가루 약간 설탕 조금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말해도

 당신의 무사한 앞니가

 오늘날 가장 큰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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