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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세월 저편

 

어떻게든 이별:류근 시집, 문학과지성사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류근 산문집, 해냄출판사

 

 

 (추억의 배후는 고단한 것 흘러간 안개도 불러 모으면 다시 상처가 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바라보는 것)

 

 바람은 아무거나 흔들고 지나간다

 여름 건너 하루해가 저물기 전에

 염소 떼 몰고 오는 하늘 뒤로 희미한 낮달

 소금 장수 맴돌다 가는 냇물 곁에서

 오지 않는 미래의 정거장들을

 그리워하였다

 얼마나 먼 길을 길 끝에 부려두고

 바람은 다시 신작로 끝으로 달려가는 것인지

 만삭의 하늘이 능선 끝에

 제 내부의 붉은 어둠을 쏟아내는 시간까지

 나 한 번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그 먼 강의 배후까지를

 의심하였다 의심할 때마다 

 계절이 바뀌어 그 이듬의 나뭇가지

 젖은 손끝에 별들이 저무는 지평까지 나는 자라고

 풍찬노숙의 세월을 따라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어디까지 흘러가면 아버지 없이 눈부신 저 무화과 나무의 나라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흘러가면 내가 아버지를 낳아 종려나무 끝까지 키울 수 있을까)

 

 세상에 남겨진 내가 너무 무거웠으므로

 때로 불붙는 집 쪽에서 걸어 나오는

 붉은 짐승을 꿈을 신열처럼 따라가고

 

 오랜

 불륜과도 같은 세월 뒤로 손금이 자랐다

 아주 못 쓰게 된 헝겊 조각처럼

 사소한 상처 하나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단층도 없이 흘러가 쌓였다

 이쯤에서 그걸 바라본다

 황혼 건너

 저 장대비 나날의 세월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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