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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트라클 - 폭풍 치는 저녁 오 붉게 물든 저녁의 시간이여! 열린 창문가에서 파르르 흔들리는 포도잎은 푸름과 어지럽게 뒤엉키고 집 안은 불안한 귀신들의 소굴 시궁창의 악취 속에 먼지가 춤춘다 바람은 덜컥이며 창문에 부딪히고 한 무리 성난 야생마들처럼 콰르릉 번쩍이는 구름들이 몰려온다 호수의 거울이 시끄럽게 부서진다 창틀에 앉은 갈매기들의 비명 불의 기사가 언덕을 질주하다 전나무 숲에서 우지끈 화염으로 변한다 병자들이 병원에서 신음을 내지른다 검푸르게 떨리는 밤의 깃털들 불현듯 번쩍거리면서 쏴아 지붕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게오르크 트라클 - 소년 엘리스에게 엘리스, 검은 숲속에서 지빠귀가 부르면, 이것이 너의 하강이다. 네 입술은 암반의 푸른 샘물, 그 차가움을 마신다. 내버려두어라, 네 이마에서 조용히 흘러내리는 태고의 전설들을 새들의 비행에 대한 어두운 해명을. 그러나 너는 유연한 걸음으로 밤을 향해 간다, 자주새 포도가 헝클어진 밤, 푸름 속에서 너는 팔을 더욱 아름답게 꿈틀거린다. 가시덤불 하나가 울린다, 네 월광의 눈동자가 머무는 곳에서. 오,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너 엘리스는, 죽어 있었느냐. 네 몸은 한 송이 히아신스, 수도슫이 밀랍 같은 손가락을 꽃 안에 담근다. 우리들의 침묵은 검은 동굴, 거기서 이따금 기어 나오는 여린 짐승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감는다 네 관자놀이에 맺히는 검은 이슬, 이는 몰락한 별들의 마지막 황금.
게오르크 트라클 - 모두 떠나간 방에서 창문, 형형색색의 화단, 오르간 소리 하나 밀려온다 벽지 위에서 그림자가 춤추니 기묘한 광기의 윤무 활활 타오르며 흔들리는 덤불들 모기 떼 한 무리가 달려든다 멀리 밭에서는 낫질을 하고 오래된 물 하나가 노래 부른다 누구의 숨결이 나를 만지러 오려나? 제비들이 그리는 어지러운 문자들 무한 속에서 조용하게 저 너머로 흘러가는 금빛의 숲 화단에서 화염이 일렁인다 황홀감에 어지러운 광기의 윤무가 누런 벽지 위에서 펼쳐진다 누가 문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정향과 배의 향기 감미로울 때 유리와 상자의 빛이 어두워진다 뜨거운 이마가 서서히 고개를 떨구고 하얀 별들을 내려다본다
게오르크 트라클 - 아름다운 도시 오래된 광장이 해맑게 침묵한다 푸름과 황금에 깊이 엮인 채로 순한 수녀들이 꿈결처럼 서두른다 너도밤나무의 축축한 침묵 아래서 갈색의 빛으로 환한 교회에서 죽음의 순수한 상들이 밖을 내다보니 이는 군주들이 들던 아름다운 방패들 왕관이 내는 빛으로 가득 찬 교회 말들이 분수 밖으로 몸을 꺼내고 나무들은 꽃 같은 발톱을 내민다 꿈꾸느라 머리가 혼탁한 남자애들은 저녁의 분수가에서 조용히 놀고 있다 여자애들은 성문 앞에 모여서 형형색색의 삶 속을 수줍게 훔쳐본다 그 젖은 입술은 살짝 떨리는데 또 성문 앞에서 기다릴 뿐 종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퍼져나가고 행진 구호와 초병의 외침이 들린다 이방인들이 계단에 서서 귀 기울인다 저 위, 푸름 속에 들리는 오르간 소리 밝은 악기들이 노래한다 이파리로 이루어진 정원의 액자..
게오르크 트라클 - 기타 소리 가득한 나뭇잎 사이로... 기타 소리 가득한 나뭇잎 사이로 여자애들의 노란 머리칼이 휘날리고 해바라기가 모여 있는 목책 곁 황금 수레가 구름을 가르며 지나가네 갈색 그림자의 고요 속에 침묵하는 흐리멍텅한 노인들, 서로를 껴안네 어여쁜 고아들이 저녁기도를 올리고 노란 안개 속에 파리들이 윙윙대네 냇가에서 아직도 빨래하는 여인네들 바람에 걸어둔 천들이 부풀어 오르고 내가 오래도록 마음에 두었던 여자아이 저녁의 음산함 사이로 또 걸어오네 미지근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참새들 부패로 가득 찬 녹색 구멍들에 파묻히고 굶주린 자는 회복되고 있다고 착각하네 빵의 향기와 향신료의 냄새에 취해
게오르크 트라클 - 젊은 하녀 1 우물가에서 자주, 어스름 속에 주술에 걸린 채로 서 있는 그녀 물을 긷는 모습, 어스름 속에. 두레박이 오르락내리락하네 너도밤나무 위 갈까마귀가 퍼덕일 때 그녀는 점점 그림자 같이 변해가네 누렇게 바랜 머리칼이 휘날리고 마당에서는 들쥐들이 비명을 지르네 타락의 감언에 기뻐진 그녀는 불타오는 눈꺼풀을 짓누르네 타락해가는 목마른 풀잎들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경배하네 2 그녀가 방 안에서 조용히 잠든 동안 집은 어느새 이미 폐허로 변했네 방 앞 딱총나무 위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하는 지빠귀 거울에 비친 은색 얼굴이 마치 낯선 사람처럼 그녀를 쳐다보네, 황혼녘 거울 속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 순결함에 소스라친 그녀 마음은 회색 어둠 속에서 꿈결처럼 들려오는 하인의 노랫소리 고통으로 몸서리치는 그녀의 굳은..
보르헤스 - 추측의 시 최후의 오후, 총탄이 귀청을 울린다. 먼지를 흩날리며 바람이 휘몰아치고, 기괴한 전투가 낮 동안 전개되는데, 승리가 적의 것이네. 승리하네 야만인들이, 가우초들이 승리하네. 법률과 교리를 공부했던 내가, 이 살벌한 지방들의 독립을 선언했던 나 프란시스코 나르시소 데 라프리다가 패하였다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로, 넋이 빠져 희망에다 두려움마저 상실한 채 끝 다한 아라발들을 지나 남쪽으로 도주하네. 평원을 피로 물들이며 도보로 패주하다 다다른 이름 모를 어느 거무스름한 강에서 죽음이 눈을 감기우고 넘어뜨렸던 그 대위처럼, 나도 그렇게 스러지리라. 오늘이 마지막이려네. 나를 노리며 늪지를 잠식하는 밤으로 주춤거리네. 기수, 말, 창과 함께 이 몸을 찾아 헤매는, 달아오른 내 죽음의 말발굽 소리. 판결, ..
보르헤스 - 순환하는 밤 피타고라스의 까다로운 제자들은 알고 있었지. 우주와 인간이 순환한다는 것을. 숙명적으로 미립자가 황금빛 성마른 아프로디테, 테베인들, 아고라를 복제한다는 것을. 켄타우로스는 미래에 통말발굽으로 라피테스족의 가슴을 짓밟으리. 로마가 티끌로 화할 때, 미노타우로스는 악취 풍기는 그의 궁전 속에서 무한한 밤을 신음하리라. 모든 불면의 밤이 세세히 회귀하리라. 이 글을 쓰는 손도 동일한 배에서 또다시 출생하리라. 강고한 군대가 심연을 건설하리라. (에든버러의 데이비드 흄이 똑같은 말을 했네.) 시간 단위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듯, 제2의 주기에서 우리가 그렇게 회귀할지는 모르겠네. 하나 피타고라스의 암묵적인 순환이 밤이면 밤마다 우주의 한 지점에 나를 위치시킴을 아네. 아라발에 속해 있는 지점이지. 북쪽에 있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