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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트라클 - 젊은 하녀

 

몽상과 착란, ITTA 꿈속의 제바스치안:게오르크 트라클 시선집, 울력 푸른 순간 검은 예감, 민음사 색의 제국:트라클 시의 색채미학, 서강대학교출판부

 

 

 1

 우물가에서 자주, 어스름 속에

 주술에 걸린 채로 서 있는 그녀

 물을 긷는 모습, 어스름 속에.

 두레박이 오르락내리락하네

 

 너도밤나무 위 갈까마귀가 퍼덕일 때

 그녀는 점점 그림자 같이 변해가네

 누렇게 바랜 머리칼이 휘날리고

 마당에서는 들쥐들이 비명을 지르네

 

 타락의 감언에 기뻐진 그녀는

 불타오는 눈꺼풀을 짓누르네

 타락해가는 목마른 풀잎들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경배하네

 

 2

 그녀가 방 안에서 조용히 잠든 동안

 집은 어느새 이미 폐허로 변했네

 방 앞 딱총나무 위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하는 지빠귀

 

 거울에 비친 은색 얼굴이 마치

 낯선 사람처럼 그녀를 쳐다보네, 황혼녘

 거울 속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 순결함에 소스라친 그녀 마음은 회색

 

 어둠 속에서 꿈결처럼 들려오는 하인의 노랫소리

 고통으로 몸서리치는 그녀의 굳은 몸

 어둠을 뚫고서 붉음이 뚝뚝 떨어진다

 성문 쪽에서 남풍이 몰아치며 발광한다

 

 3

 밤이면 풀도 없는 마을 풀밭에서

 그녀 신병으로 몸을 들썩대네

 바람이 풀밭에서 내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

 나뭇가지에 걸린 달이 조용히 엿드네

 

 이제 사방의 별들은 빛깔을 잃고

 무거운 짐으로 지쳐버린

 그녀의 두 뺨도 빛깔을 잃고

 땅에서는 썩음의 냄새가 풍겨오네

 

 늪가의 갈대밭은 슬프게 흔들리고

 바닥에 움츠린 그녀는 오한에 몸을 떠네

 멀리서 수탉 한 마리가 울 때, 늪에서는

 단단한 회색의 아침이 덜덜 떨리네

 

 4

 망치 소리 쩌렁쩌렁 울리는 대장간

 문 앞을 그녀가 훌쩍 스쳐가네

 하인이 벌겋게 달궈진 망치를 휘두를 때

 그녀는 죽은 듯이 멍하니 반대편을 보네

 

 마치 꿈결처럼, 그녀를 향한 웃음이 터지네:

 대장간 안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

 사내의 웃음 앞에 몸을 수그리니

 망치의 단단함이여 투박함이여

 

 가게 안에서 환하게 튀어 오르는 불꽃

 그녀 어쩔 줄 모르는 몸짓으로

 거친 불꽃을 잡아보려 손을 뻗다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지네

 

 5

 침대에 수척한 몸을 뉘인 그녀

 달콤한 공포를 가득 품은 채로 깨어나네

 그녀의 더러운 잠자리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것을 보네

 

 창가에 자라는 레제다를 보고

 맑고 푸르른 하늘을 보네

 가끔 바람은 창가까지

 어느 희미한 종소리를 실어다주네

 

 베개 위로 그림자가 미끄러지고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베개 위에서 거친 숨을 쉬는 그녀

 그 입은 마치 상처와 같네

 

 6

 저녁이 되면 피로 물든 천이 떠오르니

 말 없는 숲 위에 걸리는 구름들은

 새까만 천에 휘감겨 있고

 밭은 참새들의 지저귐으로 시끄럽네

 

 어둠 속에 홀로 하얗게 누운 그녀

 지붕 아래에서 들끓던 무언가가 숨을 거두네

 덤불이나 어둠 속에 버려진 썩은 고기처럼

 그녀의 입에 파리 떼가 몰려드네

 

 마을에서 꿈결같이 흘러나오는 소리

 어쩌면 춤과 현악의 소리인 듯

 그녀의 얼굴이 마을을 떠돌며 일렁이고

 머리칼은 잎도 없는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