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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 추측의 시

 

창조자, 민음사 죽음의 모범:보르헤스 가명 소설 모음집, 민음사 알레프, 민음사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 민음사

 

 

 최후의 오후, 총탄이 귀청을 울린다.

 먼지를 흩날리며 바람이 휘몰아치고,

 기괴한 전투가 낮 동안 전개되는데,

 승리가 적의 것이네.

 승리하네 야만인들이, 가우초들이 승리하네.

 법률과 교리를 공부했던 내가,

 이 살벌한 지방들의

 독립을 선언했던 나

 프란시스코 나르시소 데 라프리다가 패하였다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로,

 넋이 빠져 희망에다 두려움마저 상실한 채

 끝 다한 아라발들을 지나 남쪽으로 도주하네.

 평원을 피로 물들이며 도보로 패주하다 다다른

 이름 모를 어느 거무스름한 강에서

 죽음이 눈을 감기우고 넘어뜨렸던 그 대위처럼,

 나도 그렇게 스러지리라.

 오늘이 마지막이려네.

 나를 노리며 늪지를 잠식하는 밤으로 주춤거리네.

 기수, 말, 창과 함께

 이 몸을 찾아 헤매는,

 달아오른 내 죽음의 말발굽 소리.

 

 판결, 책, 포고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던 내가

 노천 수렁 속에 잠들지리니.

 하나 설명할 길 없는 은밀한 환희가

 내 가슴을 신들리게 한다.

 남아메리카에서의 내 운명과 마침내 조우했음이니.

 어린 시절 언젠가부터 내 삶의 나날들이

 옭아 왔던 걸음걸음, 그 여러 겹 미로가

 나를 이 몰락의 오후로 쭈욱 이끌었지.

 마침내 내 인생의,

 숨겨진 열쇠를 발견하였네.

 프란시스코 데 라프리다의 운명,

 빠져 있었던 문자,

 애초에 신이 인지한 완벽한 형상을.

 오늘 밤이라는 거울에서

 의심할 바 없는 영원한 내 얼굴에 도달하네.

 원이 완성될 것이고, 나도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지.

 

 나를 쫓던 창 그림자가 발치를 밟는다.

 죽음의 악다구니, 기수, 말갈기, 말이

 나를 옥죄어 오고......

 벌써 첫 번째 충격이,

 벌써 가슴을 가르는 단단한 칼날이,

 숨통에 와 닿는 내밀한 비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