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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 거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 대평원 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 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 소박한 집들이 있는, 자애로운 나무들마저 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 이런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숱한 삶이 집안에만 은거하길 거부하며 거리의 보호 아래 형제애를 나누고 우리네 희망이 부풀려진 영웅적 의지로 거리를 떠다니기에. 깃발처럼 거리가 사방으로 펼쳐지네. 우뚝 솟은 내 시에서 그 깃발이 하늘을 펄럭이기를.
보르헤스 - 아드로게 늘상 똑같은 노래를 조율하는 은밀한 새, 순환하는 물, 야외 테이블, 어렴풋한 동상, 괴이한 폐허. 향수 어린 사랑이나 여유로운 오후에 어우러지는 이 정경이 연출된 공원. 그곳의 검은 꽃들 사이로 내가 사라진들, 불가해한 밤에는 아무도 저어하지 않으리. 공허한 어둠에 잠긴 공허한 차고 문이, 베를렌도 훌리오 에레라도 유쾌해 했던 분가루와 재스민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의 너울거리는 경계를 가르고 있음을 나는 아네. 유칼리 나무 약 내음이 어둠에 깃들이네. 시간과 모호한 언어를 초월하여 별장촌 시절을 회상시키는 해묵은 내음이. 내 발걸음은 고대하며 찾던 입구를 발견한다. 발코니가 그 어스름한 윤곽을 정의하고, 체스 무늬 정원에서는 수도꼭지가 주기적으로 물방울을 떨군다. 문들 저편에는 환영의 어둠 속에서 꿈의 ..
보르헤스 - 앵글로 색슨 문법 공부를 시작하며 오십 세대 만에 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그런 심연을 제공하는 법) 바이킹의 용들도 다다르지 못한 어느 커다란 강 배후지에서 생경하고 어려운 어휘들에게로 회귀한다. 하슬램이나 보르헤스가 되기 전인 노섬브리아와 머시아 시절, 기진맥진한 입으로 사용했던. 줄리어스 시저가 브르타뉴를 발견한 로마의 첫 번째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토요일에 읽었네. 포도가 다시 열매 맺기 전, 나는 불가사의한 나이팅게일 소리와 왕의 봉분을 둘러싼 열두 무사의 비가를 들으리. 예전에는 누군가가 바다나 칼을 예찬하려 사용한 비유적 표현이었을 이 어휘들은 상징의 상징, 후세의 영어나 독일어의 변주곡 같네. 내일 그가 다시 삶을 살리라. 내일 fyr는 fire가 아니라, 해묵은 놀라움 없이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일종의 길들여진 변덕..
보르헤스 - 아리오스토와 아랍인들 그 누구도 책을 쓸 수 없다. 진정한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서는 여명과 석양, 세월, 무기, 만남과 헤어짐의 바다가 필요하니까. 아리오스토는 그렇게 생각했고, 밝은 대리석과 짙은 소나무가 어우러진 여유로운 길에서 이미 꿈꾼 것을 다시 꿈꾸는 느긋한 즐거움에 몸을 맡겼네. 그의 이탈리아의 공기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네, 고난의 세월 동안 대지를 탈진시킨 전쟁의 꿈이 기억과 망각의 날실을 자아냈지. 아키타니아 계곡으로 들어갔던 한 부대가 매복에 빠졌네. 롱스발에서 요동친 뿔나팔과 검의 꿈은 이렇게 탄생했네. 강인한 색슨 족은 오랜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텃밭마다 영웅들과 군대를 흩뿌렸네. 여기서 아서 왕의 꿈이 유래했지. 눈부신 태양이 대양마저 삼켜 버리는 북방 군도로부터 불에 둘러싸여 주인을 기다리는..
보르헤스 - 송가 1960 내 운명이라는 이 꿈을 주관하는 명확한 우연이나 은밀한 법칙이 바라네.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진솔한 대화가 신들이 사랑하는 의식과 어둠, 또한 시의 고상함에 호소하기를. 영광과 굴욕이 교차하는 다사다난했던 일백오십년을 품에 보듬는 아, 필연적이고 달콤한 조국. 조국이여, 너를 이런 것들에서 느꼈네. 드넓은 아라발의 허물어지는 일몰, 팜파의 바람에 현관까지 쓸려 온 용설란꽃, 수더분한 비, 천체의 느긋한 습성, 기타를 뜯는 손, 영국인들이 바다에 그러하듯 우리네 피가 멀리서도 느끼는 대평원의 인력, 어느 납골당의 자애로운 상징과 병 모양 장식, 사랑의 미약 재스민, 틀 가장자리를 두른 은, 은은한 마호가니의 부드..
보르헤스 - 또 다른 호랑이 나는 한 마리 호랑이를 사유한다. 어스름이 광대무변의 분주한 도서관을 예찬하고 서가를 아득하게 하는 듯하네. 힘차게, 천진스럽게, 피범벅으로, 새롭게 호랑이가 그의 밀림과 아침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리. 이름 모를 강가 진흙벌에 자욱을 남기고. (그의 세계는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없고, 다만 어떤 찰나만이 있을 뿐이네.) 야만적 거리를 도약하리. 난마 같은 냄새의 미로에서 여명의 내음과 열락의 사슴 내음을 찾아다니리. 나는 대나무 무늬 사이로 그의 줄무늬를 해독하고 전율이 감도는 휘황찬란한 호피에 감싸인 골격을 짐작하네. 지표면의 둥근 바다와 사막은 헛되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지. 머언 남아메리카 하구의 집에서부터 내가 너를 쫓고 꿈꾸거늘. 아! 갠지스 강변의 호랑이여. 영혼에 오후가 흩뿌려지고 나는 성찰..
보르헤스 - 비 가랑비가 내리니 갑자기 오후가 갠다. 내리다인지 내렸다인지. 분명 비는 과거에 일어나는 일이지. 빗소리를 듣는 이는 그지없는 행운이 장미라 부르는 꽃과 유채색 신기한 색조를 현현시켰던 그 시간을 회복하였네. 유리창을 눈멀게 하는 이 비가, 상실된 아라발의 지금은 가 버린 어느 정원 포도 덩굴 검붉은 알갱이에 생기를 돋우리. 젖은 오후는 내가 갈망하던 목소리, 죽지 않고 회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돌려주네.
보르헤스 - 달 역사에 등장하네. 실제, 상상, 의혹의 일들이 무수히 교차했던 옛날 옛적, 한 권의 책에 우주를 담으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품은 이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고귀하고 난해한 원고를 곧추세웠지. 그리고 마지막 행을 다듬어 낭송했네. 운 좋게도 뜻을 이룰 뻔했지. 그런데 눈을 들자마자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원을 보고 얼이 빠졌네. 달을 잊었던 거지. 설령 허구일지라도, 이 이야기는 우리네 삶을 언어로 바꾸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연상시키네. 본질은 언제나 상실되는 것. 영감을 지배하는 절대적 법칙이지. 달과의 내 오랜 실랑이에 대한 다음 요약도 피할 수 없을. 나는 달을 어디서 처음 봤는지 모르네. 앞서의 그리스인이 말한 하늘에서였는지, 우물과 무화과나무의 정원으로 기우는 오후에서였는지. 유전하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