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 모래 시계
견고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여름의 막대기로 시간을 재든, 헤라클레이토스가 우리네 광기를 보았던 강물로 시간을 재든 무슨 상관이랴. 불가항력적인 한낮의 그림자도, 자신의 길만 재촉하는 돌이킬 수 없는 물결도, 시간이나 운명과 매한가지이니. 상관없으리. 하나 시간은 사막에서, 죽은 자들의 시간을 재기 위해 고안된 듯한 부드러우나 버거운 자양분을 발견했네. 삐딱한 비숍과 맥없는 칼, 희뿌연 망원경, 아편에 좀먹은 백단향, 먼지, 우연, 무의 회백색 세계로 스산한 골동품 상인들이 밀어 둘 것 같은 물건. 사전 삽화용 알레고리 도구가 이렇게 생겨나네. 신의 오른 손아귀에서, 뒤러가 그 선을 답습한 낫까지 동반했던 냉혹하고 음산한 그 도구 앞에서 누군들 멈칫하지 않았으랴? 열린 정점으로, 뒤엎어진 원추형이 숙연하게..
보르헤스 - 축복의 시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 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 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