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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 거울 나는 거울에 공포를 느꼈네. 살 수 없는, 상들만의 거짓 공간이 다하고 시작하는 침투할 길 없는 거울 면에는 물론, 파문이 일거나, 역상의 새가 이따금씩 환영의 날갯짓을 아로새기는 심연의 하늘 안에 또 다른 푸르름을 모방하는 사색에 잠긴 물 앞에서도, 아련한 대리석과 장미의 순백색을 꿈처럼 답습하는 윤기를 지닌 오묘한 흑단의 고즈넉한 표면 앞에서도, 유전하는 달빛 아래 당혹스런 세월을 숱하게 방랑한 뒤, 오늘 나는 어떤 운명의 장난이 거울에 공포를 느끼게 했는지 묻는다. 금속의 거울들, 응시하고 응시되는 얼굴이 붉은 노을 안개 속에 흐릿해지는 마호가니 가면 거울, 그 옛날 협약의 근원적 집행자들이 잠들지도 않고 숙명처럼, 생식하듯 세계를 복제하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네. 거울은 자신의 현란한 거미줄에..
보르헤스 - 모래 시계 견고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여름의 막대기로 시간을 재든, 헤라클레이토스가 우리네 광기를 보았던 강물로 시간을 재든 무슨 상관이랴. 불가항력적인 한낮의 그림자도, 자신의 길만 재촉하는 돌이킬 수 없는 물결도, 시간이나 운명과 매한가지이니. 상관없으리. 하나 시간은 사막에서, 죽은 자들의 시간을 재기 위해 고안된 듯한 부드러우나 버거운 자양분을 발견했네. 삐딱한 비숍과 맥없는 칼, 희뿌연 망원경, 아편에 좀먹은 백단향, 먼지, 우연, 무의 회백색 세계로 스산한 골동품 상인들이 밀어 둘 것 같은 물건. 사전 삽화용 알레고리 도구가 이렇게 생겨나네. 신의 오른 손아귀에서, 뒤러가 그 선을 답습한 낫까지 동반했던 냉혹하고 음산한 그 도구 앞에서 누군들 멈칫하지 않았으랴? 열린 정점으로, 뒤엎어진 원추형이 숙연하게..
보르헤스 - 축복의 시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 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 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
이제니 - 발화 연습 문장 (-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돌보는 날들이다.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로 기능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다. 말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말이 없었으므로 지나간 기억들은 하나둘 지워져갔고. 알고 있었던 것이 더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써 내려가던 종이를 구겼다. 분절된 동작을 찬찬히 바라보듯 천천히 천천히 종이를 구기고 있으면 한겨울 눈밭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구겨진 글자와 글자 속에서. 얇아질 대로 얇아진 종이의 질감 위에서. 모르는 들판 속으로 더욱더 깊이 걸어 들어가는 우리가 있었고. 다른 누구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존재들로서. 우리가 우리를 떠나온 이유는 그곳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는 몇 개의 사물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구슬 ..
이제니 - 발화 연습 문장 (-떠나온 장소에서) 나는 이 슬픔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언덕이 머물러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이 언덕이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내가 바라보는 이 하늘도 이 나무도 이 바람도 이 돌멩이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머물러 있지 않음. 물으려 하지 않음. 묻으려 하지 않음. 말하려 하지 않음. 오래전 나는 이곳을 우연히 여행하게 되었고 이후로 오래도록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생활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그곳에 감으로써 나의 삶 전체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나의 삶은 이런 생각과 함께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언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곳에서 이미 오래도록 이곳의 낮과 밤을 살아왔으므로 나는 내가 떠나온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머..
이제니 - 발화 연습 문장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한다) 마주 보며 되비추는 두 개의 거울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곳에서. 점층법이 더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하는 표면이 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처럼 어떤 심층이 도착하고 있다. 구체성이 결여된 장소에서 구체성이 결여된 풍경을 떠올린다. 살아야만 했는데 살아야만 했는데 오래도록 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끼어든다. 십구 페이지 이십 페이지 찢었다. 중복된 문장과 반복된 약속과 수정된 광기와 망각된 용기와 드물게 피어오르기도 했던 온건한 사랑이 뒤섞인 목소리 속에서. 더듬어서 다시 말해볼 수 있다. 사십삼 페이지 사십사 페이지 찢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어보겠다는 말이 있다. 나를 ..
이제니 - 발화 연습 문장 제목과 무관한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한 줄 와서 읽고 한 줄 와서 지운다. 한 줄 와서 지우고 한 줄 와서 쓴다. 누군가 네게로 와서 살았고 너 역시도 누군가에게로 가서 살았다. 나는 누군가의 몸이었던 적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영혼이었던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밤 아무도 모르게 내리던 흰 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잊고 있었던 전생을 이해하듯이 닫힌 입의 숨은 감정을 헤아려본다는 것. 그러니까 다시 어떤 고요함 속에서 시작한다. 너는 한밤중 문득 깨어나 곡예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곡예하는 사람은 어떤 이미지로서 너를 사로잡는다. 한계 상황으로 너를 밀어 넣는다. 곡예는 지난한 침묵을 요구한다. 곡예는 지극한 집중을 요구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얼마나 온전히 남을..
이제니 - 발화 연습 문장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혼자이기 위해 집으로 가듯 너는 쓴다. 종이 위에서 쓴다. 흘려서 쓴다. 자신에게조차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팔분음표에 하나씩. 한 걸음에 하나씩.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끊어지듯 이어지며. 이어지듯 끊어지며. 어떤 기계음처럼. 단속적으로. 소리 아닌 소리로 발음되기를 바라면서. 발화자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다. 문이라는 듯이. 그리움이라는 듯이. 열고 열리는 마음이라는 듯이. 마음은 통과한다. 기억은 건너뛴다. 너는 너라고 썼다가 지운다. 너는 나라고 썼다가 지운다. 인칭은 끝없이 나아간다.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이인칭에서 삼인칭으로. 삼인칭에서 다시 일인칭으로. 너는 여러 겹을 가진 인칭 속으로 숨는다. 여러 겹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어떤 주어 속에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