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슬픔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언덕이 머물러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이 언덕이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내가 바라보는 이 하늘도 이 나무도 이 바람도 이 돌멩이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머물러 있지 않음. 물으려 하지 않음. 묻으려 하지 않음. 말하려 하지 않음. 오래전 나는 이곳을 우연히 여행하게 되었고 이후로 오래도록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생활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그곳에 감으로써 나의 삶 전체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나의 삶은 이런 생각과 함께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언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곳에서 이미 오래도록 이곳의 낮과 밤을 살아왔으므로 나는 내가 떠나온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머물지 않는 돌 위로 머물러 있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시선도 당신의 시선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의 시선도 아닙니다. 돌멩이를 바라보는 돌멩이. 모퉁이를 바라보는 모퉁이. 돌. 작은. 돌. 작은. 돌. 동물의 뼛조각과도 같은. 작은 돌이 여러 개 있습니다. 머물러 있지 않는 여러 개의 이름과 머물러 있지 않은 여러 개의 인칭이 있습니다. 나는 이 언덕에 여러 개의 얼굴을 심었고 피웠고 지웠습니다. 표정은 어느 순간 문득 드러나는 것이기 이전에 기나긴 시간을 두고 세심히 각인되어온 무엇입니다. 구멍을 내듯이 파내는 것. 조각을 하듯이 뾰족한 것으로 긁어내는 것. 그것은 글쓰기의 영역에 가까운 것입니다. 오래도록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이 어떤 말들은 한달음에 새겨집니다. 하나의 심장이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품기 위해선 한 생애 내내 열망해왔던 것이 실은 채울 수 없는 제 자신의 결핍이었음을 깨닫는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마땅히 주어져야만 했던 관심과 애정 앞에 간신히 주어지는 그 모든 미숙한 사랑들. 사람에게서 사람의 표정을 빼앗는 그 모든 말과 침묵들. 새로운 시간과 장소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게 하는 나날들이 있습니다. 지우려고 했기에 지워지지 않는 얼굴이 있었고. 나는 자주 읽고 자주 쓰고 자주 그리고 자주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실을 아니 자기 자신만의 진실을 찾고 간직하는 일은 점점 더 요원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매일매일의 창에 매일매일의 풍경이 매일매일 다르게 다가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합니다. 나는 그것을 쓰고 쓰고 씁니다. 나는 그것을 지우고 지우고 지웁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집요한 사냥꾼이며 때로는 선별하고 선택하는 자이며 때로는 감탄하고 찬탄하는 사람이며 때로는 기도하기 위해 엎드리는 사람이며 때로는 후회와 반성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살았고 여기에서 죽었습니다. 바라던 대로 나는 이곳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며. 오직. 머물지 않는. 작은 돌이. 작은 돌이. 작은 돌이. 때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작은 달이. 작은 달이. 작은 달이. 서로가 서로를. 되비추고 있는. 어떤 풍경들이. 오래도록. 꿈꾸어왔던. 희미한. 소망처럼. 누군가의. 창 앞으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이 모든 풀과 돌과 나무와 바람에서 떠나온 사람의 얼굴을 읽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을 품고 있습니다.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언덕 저 너머에서 불어오면서 흩어지고 있는 어떤 목소리뿐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느낍니다. 나는 하나의 정신을 말아 쥐듯 휘어지고 있는 나무의 가지를 만집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 매일매일 이 아침의 언덕 위에 서 있습니다. 이제 내가 떠나온 장소가 이곳인지 그곳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내뱉지 않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말의 자리에는 늘 선행된 말과는 다른 무엇이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떠나온 장소에도 이미 말하지 않은 말들이 고여서 흐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이곳에서 그곳으로. 머물지 않는 공기가 이곳까지 따라와 소리 내지 않은 말들을 계속해서 덧붙이고 있는 까닭입니다. 당신도 돌의 얼굴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돌의 주름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돌의 표정을 알아차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입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때로 부드러운 미소로 비치기를 바랍니다. 우는 얼굴이라면 우는 얼굴 그대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슬픔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언덕을 떠나지 않는 목소리의 말 없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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