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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발화 연습 문장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한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시집, 문학과지성사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이제니 시집, 현대문학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마주 보며 되비추는 두 개의 거울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곳에서. 점층법이 더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하는 표면이 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처럼 어떤 심층이 도착하고 있다. 구체성이 결여된 장소에서 구체성이 결여된 풍경을 떠올린다. 살아야만 했는데 살아야만 했는데 오래도록 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끼어든다. 십구 페이지 이십 페이지 찢었다. 중복된 문장과 반복된 약속과 수정된 광기와 망각된 용기와 드물게 피어오르기도 했던 온건한 사랑이 뒤섞인 목소리 속에서. 더듬어서 다시 말해볼 수 있다. 사십삼 페이지 사십사 페이지 찢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어보겠다는 말이 있다.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다시 찢었다.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하는 이후의 삶이 있다. 마음과 마음을 구분하지 않는 마음속에서. 물과 불을 동시에 만지는 손가락 곁에서. 껍질과 덮기를 하나의 용도로 쓰는 사람 앞에서. 종소리가 바람의 움직임을 알리고 있는 어두운 한낮이 있었다. 축하 카드는 텅 비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글자를 아무도 모르는 발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더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의 생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도형의 비밀은 찢어진 페이지 한편에 적혀 있었다. 선과 선 면과 면 각과 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더는 만질 수 없는 도형 하나가 오래된 내 고통과 슬픔과 악몽과 빈곤을 가져갔다고 믿었다. 바라보지 않는데도 얼굴을 물들이는 희미한 빛이 있었다. 너무 오래 낭비한 아름다움이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너는 백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얼굴을 다시 기억해낼 때까지. 뒤늦게 알게 되는 사랑 때문에 문득 울게 될 때까지. 이미 찢겼지만 다시 찢겨야만 하는 표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