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아직 밤은 남아 있다. 아직 밤을 이루는 별들도 별을 이루는 먼지도 먼지를 이루는 시간도 남아 있다.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이제는 없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초록과 강은 끝없이 흐른다. 꿈과 숨은 구름처럼 흘러넘친다. 눈과 보라는 다시 만날 수 없다. 피지 않은 꽃과 씌어지지 않은 종이는 모르는 아름다움을 증명한다. 해가 지기 전에 들어야만 하는 저녁 어스름. 시간은 서둘러 가고 있다. 너의 목소리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네가 사라진 자리에는 구체적인 사건이 없고 구체적인 생활이 없고 구체적인 풍경이 없다. 머리카락은 자라나고 고무줄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어느 결에는 놀이를 멈춘다. 그러나 여전히 너의 목소리는 남아 있다. 부르려 했던 음들과 가려고 했던 길들의 여음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겁도 없이 낯선 이에게 다가가는 어린 고양이야. 방울을 흔들며 꼬리부터 사라지는 여린 색깔아. 세상의 그 모든 신비를 보고 싶어 했던 작고 흐린 무늬야. 발음하는 사물 사물들마다 제 이름을 찾아주려던 주린 가슴아. 이제는 다시 새길 수 없는 너의 그림자 위로 죽음에 가까워져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나의 어둠이 겹쳐 흐른다. 우리가 몇 개의 음표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의 악보로 나뉘게 되었을 때. 우리들의 익숙한 골목을 가로지르는 저 개들의 무심한 눈빛과 더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이파리들을 가만가만 흔드는 저 너머의 아지랑이. 그러니 아직 밤은 남아 있다. 그러니 아직 건너갈 낮은 남아 있다. 이루지 못한 너의 표정들이 채우지 못한 나의 건반과 건반 사이를 흐르지 못한 음과 음으로 건너가고 있다. 한 줄 한 줄 몰려왔다 물러나는 물과 불과 흙과 공기. 그러니까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내내 달려가는 개들의 걸음과 이내 사라지는 아지랑이 곁으로 미처 들려오지 못한 너의 목소리가 내려앉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사라져간 박동을 되짚어가듯. 매일매일 오는 밤 속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별들의 호흡을 헤아리면서. 그러니까 아직 밤은 남아 있다. 아직 밤을 이루는 울음도 울음을 이루는 걸음도 걸음을 이루는 숨결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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