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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발화 연습 문장 (-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시집, 문학과지성사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이제니 시집, 현대문학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돌보는 날들이다.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로 기능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다. 말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말이 없었으므로 지나간 기억들은 하나둘 지워져갔고. 알고 있었던 것이 더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써 내려가던 종이를 구겼다. 분절된 동작을 찬찬히 바라보듯 천천히 천천히 종이를 구기고 있으면 한겨울 눈밭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구겨진 글자와 글자 속에서. 얇아질 대로 얇아진 종이의 질감 위에서. 모르는 들판 속으로 더욱더 깊이 걸어 들어가는 우리가 있었고. 다른 누구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존재들로서. 우리가 우리를 떠나온 이유는 그곳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는 몇 개의 사물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구슬 같았고 동전 같았고 모자 같았고 그릇 같았다. 그것은 바람이며 바닥이며 마주함이며 주저함이다. 사물은 움직입니다 움직여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무수한 방향에서 무수한 방향으로. 물은 쏟아지고 꽃잎은 떨어지고 내뱉은 말은 어딘가에 고여 웅덩이로 차오릅니다. 내뱉은 말과 말 속에서 말을 잃은 사람들이 익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너인 것처럼 보이는 풍경을 마주하며 주저했기 때문이다. 식탁 위의 벽시계는 어김없이 시간의 걸음걸음을 알리고 있었다. 작은 나무 창문을 들락거리며 작은 나무 새가 규칙적인 울음을 들이쉬고 있었다. 단조로운 소리가 너와 나를 죽이고 있구나. 방의 구석진 자리로 가 몸을 누이면 내뱉지 못한 말들 속에서 파문과도 같은 소리가 밀려왔다. 어디선가 전류 흐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너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누군가의 단정적인 말과 다른 누군가의 헛된 위로 속에서 우리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으므로. 우리를 떠나온 자들이 다시 우리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홀로 같이 홀로 걷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법을 모르고. 서로에게 이해받지 못함이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으므로. 읽을 수 없는 고대어를 읽어 내려가듯. 각자의 손목 안쪽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낱말 하나를 새겨 넣듯이. 빛과 어둠의 조화로움으로. 물과 얼음의 유연한 표면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돌보는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