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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트라클 - 변용 저녁이 되면, 푸른 얼굴 하나가 조용히 그대에게서 떠나간다. 작은 새 한 마리가 타마린드 나무에서 노래한다. 연약한 수도승 하나가 죽어버린 손을 접는다. 하얀 천사는 마리아를 괴롭힌다. 밤의 관은 제비꽃과, 밀 이삭과, 자줏빛 포도로 엮였으니 이는 관조하는 자의 한 해. 그대의 발치에서 사자들의 무덤이 열린다, 그대가 은빛 손 안에 이마를 묻을 때. 그대의 입가에 사는 조용한 가을의 달 아편즙에 취한 어두운 노랫소리; 누렇게 바랜 돌밭에서 조용히 울리는 푸른 꽃.
게오르크 트라클 - 요절한 사람에게 오, 나무의 몸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오던 검은 천사여, 우리 서로에게 가벼운 가인이 되던 저녁, 푸르스름한 우물가에서. 우리의 걸음걸이는 적적했고, 둥근 눈은 가을의 갈색 냉기 안에 있었네, 오, 별들이 뿜던 자주색 달콤함이여. 그러나 그는 수도사의 산, 그 돌계단을 내려가 버렸네, 얼굴에 푸른 미소를 담고, 기묘한 고차에 싸인 채로 자기 유년 시절로 돌아가서 죽었네; 이제 정원에는 친구의 은색 얼굴만 남아 나뭇잎이나 오래된 돌의 소리를 엿듣는다네. 영혼은 죽음을, 녹색으로 문드러진 살을 노래했으니 그것은 숲의 휘몰아침이었고, 들짐승의 가슴 아픈 울음이었네. 노을에 젖은 탑에서는 계속해서 저녁의 푸른 종소리가 들려왔네. 시간이 왔기에, 그 사람은 자주색 태양 속에서 그림자를 보았네, 헐벗은 가지에 걸린..
게오르크 트라클 - 고독자의 가을 어두운 가을이 가득 품고 돌아오는 열매와 풍요, 이는 누렇게 바래버린,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광채. 순결한 푸름이 퇴락한 껍데기에서 튀어나오고; 새들의 비행에서는 오래된 전설의 소리가 난다. 포도주는 이미 빚어졌으니, 부드러운 고요는 어두운 물음들에 대한 조용한 답변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외딴 언덕에 꽂혀 있는 십자가; 붉은 숲에서 양 떼 하나가 길을 잃는다. 구름은 호수의 거울을 스치며 지나가고; 농부의 차분한 몸놀림 또한 쉬고 있다. 아주 조용히 저녁의 푸른 날개가 어루만지는 메마른 초가지붕, 시커먼 흙. 머지않아 피로한 자의 눈썹에 별들이 둥지를 튼다; 서늘한 방에는 고요한 만족감이 찾아들고 천사들이 저버리는 푸른 눈들은 부드럽게 고통받는 연인들의 것.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 뼈만 남은 음울..
이철용 - 사탄동맹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사탄동맹. 이철용. 등장인물 살로메 : 살인으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아 복역 중인 젊은 여성. 오른쪽 가슴에 수인번호를 뜻하는 666 명찰이 붙어있다. 우르술라 : 오랫동안 수형자들의 회개를 맡아 온 늙은 수녀. 수녀복을 입었고 수녀 베일을 쓰고 있다. 요한 : 젊고 신실한 남성 교도관. 1 교도소의 접견실. 중앙에 있는 유리 칸막이를 중심으로 왼쪽에 수녀-우르슬라, 교도관-요한이 있다. 오른쪽에 수형자-살로메가 있다. 유리 칸막이에는 연필이 한 자루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 몇 개가 뚫려 있다. 우르술라와 살로메는 앉아 있다. 요한은 서서 허리춤에 찬 진압봉을 매만지며 살로메를 흘겨보고 있다. 우르술라, 살로메를 응시하다가 바닥에 놓아둔 가방을 챙겨 일어선다. 살로메 - 가지마세요 수녀님! 우르술라 - ..
게오르크 트라클 - 아프라 갈색 머리칼의 아이. 기도와 아멘 소리가 저녁의 냉기를 조용히 어둠으로 적시고 아프라의 미소는 붉다, 해바라기 밭의 노란 액자 속에서, 불안과 잿빛 습기 속에서. 푸른 외투로 몸을 감싼 수도승, 오랜 세월 전에 그는 교회 창문에 그려진 경건한 그녀를 보았다; 그 기억은 아픔 속에서 친근하게 아직 머문다, 아프라의 별들이 그의 핏속을 유령처럼 떠돌 때. 가을의 몰락; 그리고 딱총나무의 침묵. 이마는 수면의 푸르른 일렁임에 가닿고, 머리털로 짠 천 한 폭이 상여 위에 놓였다. 부패한 열매들이 가지에서 후드득 떨어진다; 새들의 비행은 형언할 수 없고, 죽어가는 자들과의 조우; 그 뒤를 따르는 어두운 세월.
게오르크 트라클 - 카스파 하우저 진정 그는 태양을 사랑했으니, 언덕을 하강하는 자줏빛 태양을, 숲의 길들을, 검은 새의 노래를 녹음의 열락을. 나무의 그림자 안에서 그의 삶은 진중했고 그 얼굴엔 더러움 없었다. 신이 그의 심장에 연한 불꽃 하나를 건넸으니: 오 인간이여! 저녁에 조용한 그의 발걸음이 도시를 찾았다 그의 입에선 어두운 탄식: 나는 기사가 되고 싶다. 하나 그를 따른 것은 덤불과 짐승뿐, 하얀 인간들의 집과 노을 지는 정원이, 그의 살해자가 그의 자취를 쫓고 있었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공정한 자의 가을은 아름답다, 그의 조용한 발걸음이 꿈꾸는 자들의 어두운 방 앞에서 서성였고 밤이면 그는 자신의 별과 함께 혼자였으니; 잎 없는 가지 속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았고 노을 진 복도에서 살해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태어나지 ..
게오르크 트라클 - 묀히스베르크 산 가을 느릅나무의 그늘에서 무너진 길이 아래를 향하는 곳, 낙엽으로 지은 오두막도, 잠든 목동들도 멀리 떨어진 곳, 방랑자를 끈질기게 뒤쫓는 서늘하고 어두운 형상이 뼈로 된 다리를 건너고, 소년의 히아신스 같은 목소리는 숲의 잊힌 전설을 나지막이 말하고 있고, 이제 아픈 자는 형제의 거친 탄식을 부드러이 내뱉네. 이처럼 앙상한 녹색은 이방인의 무릎을 만지네, 돌로 변한 그의 머리를; 더 가깝게 푸른 샘물은 솟고 여인들의 탄식도 흐르네.
게오르크 트라클 - 봄 어두운 걸음걸이에 눈밭이 내려앉고, 나무 그늘에서는 연인들이 장밋빛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줄곧 선장의 외침에 뒤따르는 별과 밤; 노는 조용히 박자에 맞추어 물에 부딪힌다. 무너진 성벽에서 피어나는 제비꽃들, 그리고 조용히 초록이 피어나는 외로운 자의 옆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