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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 - 쇼펜하우어 필경사 외 4편 (2013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쇼펜하우어 필경사>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 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별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구리가 나팔이 되기 시작할 때>

 바람은 아직도 짐승을 물어 나른다 마당 우리에는 삵 같은 너구리 같은 바람이 산다 덩치 큰 짐승들 울음소리 얼음장 밑으로 새어나가는 사이 백안 속 혈류는 가팔라진다 동공을 덮은 이동식구름이 투두둑 빗방울의 감정을 시연하는 소리 들린다 젖은 땅에서 짐승의 노랑 살 냄새가 난다 풍장, 코끝이 매운 꿈이다 흔들의자에 앉은 눈동자가 절벽으로 떨어지던 그날 이후, 망상처럼 자꾸 귀는 자라나 사내를 덮었다

 소리를 들여다볼 수 있니
 결핍은 그윽한 마중물이 되곤 하지

 바람은 제 목소리로 짐승의 얼굴을 바꾼다 짐승들은 울음으로 보폭을 넓힌다 담장을 넘어서는 짐승이 비틀거리자 나무는 목청을 뽑아 혈토를 매단다 먼발치 붉은 꽃살과 툭툭 터지는 하얀 꽃살이 통증처럼 다가와 발목이 부푼다 연둣빛 이파리 하나가 연판을 돌린다 이파리가 뿌리로 내달리는 속도는 음속이다 캄캄한 물관에 어린 나팔소리가 난다 팔뚝에 불거진 혈관이 사내의 촉수를 밖으로 내몰듯 점자책을 읽던 짚풀 안대가 풀린다 상한 얼굴의 울음과 걸음을 변주하는 문향, 내습이다

 팡팡 고백하는 점자들이 라일락꽃그늘 농담을 친다



 <웰위치아>

 팔을 뻗어 모래를 문질렀다
 천둥소리 퍼진 곳까지 사막이 넓어졌다
 한차례 뇌우를
 한 해 분량으로 나누는 약사의 손끝에
 새카만 방향이 물들어 있다
 일력에서 어제 한 장을 뜯었다
 내일의 폭이 생겨났다
 똑같은 면적인데
 더 넓어 보이는 이력서는 약전처럼 접혔다
 사건들이 알약처럼 다소곳했다
 면접관이 봉투를 기울여
 덜 여문 늙은 청년을 꺼내들었다
 과거의 타진으로
 미래의 병명을 예측하는 습관은
 무성영화 속으로 나를 수없이 편입시켰다
 이력서를 움켜쥘 때 천둥소리가 들렸다
 산맥처럼 울퉁불퉁한 구김선 위로 비가 내렸다
 재생 잉크가 흘러나왔다
 글자의 높이를 잃고
 습성이 보도블럭에 엎드려 있다
 햇빛이 하루의 너비를 가늠할 때
 건성이 구김선을 되찾기 시작했다
 번개 맞은 약력 몇 줄이 꿈틀거렸다



 <생활의 달인>

 꽃차례 올라 꿀통에 빠진 적 있지
 이마에 주홍글씨 같은 주름이 생겨
 새 혐의가 있는 꿈높이 구두로 갈아 신었어

 거미는 집을 리모델링하지 않아 주저앉은 지붕의 표정을 손질하지도 않지 삐걱거리는 계단에 서서 새집 다리를 놓지 널뛰기 좋은 전망이거나 좀 후미지면 좋아 종종 명암이 분명하다는 소리를 듣곤 하지 골목의 나무쪽으로 거미줄을 쏘았어 실낱이 뚝 떨어져 공중그네를 타고 있네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 신념은 바람을 길러 어지러운 전선이 우는 골목은 흔들려

 공중에 새처럼 앉아 전선을 잇는 손이 보여 전압을 올려 끊어진 시간을 달구는 새라고 할까 뼛속이 하얗게 비어 가벼운 심장은 중력을 몰라 허공을 파서 불꽃을 산란하지 황혼녘으로 걸어간 둥근 등이네 위험 금지 팻말이 구름을 올라타고 있어 따끈한 밥상은 고압선 너머에 있지 마른침을 삼킨 태양도 하얘졌을 거야 죽음이 씹히는 길 끝에는 날개 접은 새가 흔들려

 무너져도 바람을 모시며 살고 있어 거미는 마니차 경전을 돌리듯 방적기 돌려 주문을 완성하지 어림수 놓아 유랑하는 일기의 치기까지 그물코 셈을 하지 느려도 지치지 않고 구름과자를 기대해 하늘만 보고 뛰어오른 약시와 천방지축 나대는 어린 것들 덩치 믿고 덤비는 어리석은 것들과 별을 보며 통화하고 싶어

 거미는 집을 리모델링하지 않아
 새는 공기의 저항으로 날아
 어제의 본분을 줄타기쯤으로 던져둔
 쓸쓸한 표정은 적기를 알아
 맨손으로 허공을 짓는 유목의 영혼이 이럴까



 <스리썸>

 이만 년 동안 열지 못한 문, 기필코 열겠노라
 무채색 배경 속에 유채색 몸을 박아놓은 세 사람
 씩씩대는 말소리를 사진 밖으로 퍼낸다
 화소처럼 찍히는 삽날 자국 늘어날수록
 사진이 입체를 가진 생체가 된다

 매머드 한 마리 죽지 못하고 있다는 풍문에서
 바람을 제거한 감별사가
 귀에 고여 있는 화소와 매머드의 입모양을 맞춰본다

 수술실 무명등이 세 의사의 뒷머리를 비춘다
 그림자가 없어 시선에 매달린 손이 털을 고른다
 마뜨로쉬까 인형 속에서 인형을 꺼내듯
 메스가 피부를 가른다
 가위가 근섬유를 자른다
 톱이 대퇴골을 썬다
 핀셋이 골수를 찝어낸다
 비커가 회전하며 유전자를 분리한다
 현미경의 의무를 추출한다
 주사바늘이 코끼리의 난자를 찌른다
 손이 주사기를 누른다
 매머드가 사정의 의무를 완료한다

 이종 유전자와 이속의 의무가 결합한다
 사람의 욕망이 세포분열한다

 시험관 속에서 자라나는 세 망령이
 맹세하는 자세로 머리와 손을 맞대고
 사람의 시간에 지옥의 문틀을 그려 넣는 것에 합의한다



 <냉장고의 기술>

 '첫'이란 당신을 근저당 잡았어요
 처음 느낌이 말랑하게 씹히는 그대로
 밤이면 다녀오는 문장으로
 동면하고 있어요

 죽은 새를 묻어준 손으로 사과를 먹고
 보도블럭 신발에 낀 민들레꽃과 마주하고
 아이의 손톱에 물든 오늘이 얼어가도
 나의 몸을 달군 당신과 동혈이라 믿어요

 촛붗러머 흔들리던 눈물이 증발했어요
 편백나무 향기가 피어올린 몽상이 사라졌어요
 언제부턴지 기타 선율에 흥얼대지 않아요
 문을 열면 내 피돌기로 머물다 간 것들,
 빙층으로 자란 당신이 보여요
 간신히 매달려 나를 뱉어내요

 설레던 말씨가 곱던 색깔이 얼룩얼룩 말을 하네요
 세상의 모든 최초는 동토 안에 보존되어 있다고 했나요?
 빙하 타고 내려온 먼 곳의 사연을 건너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 당신을 산란할 수 있도록
 뒤로 한번 걸어 볼까요

 수많은 '첫' 당신을 이음동의어로 읽는 것은
 손타기 쉬운 꽃 같고 날아가는 공기방울 같아
 네온별 반짝이는 사막에서 환상방황으로 당신을 놓칠까
 추렴해 봐요
 기별 없는 기억을
 세상에 없는 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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