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자를 들고 산책에 나선다 오른쪽 팔과 옆구리 사이, 상자는 얌전하고 바람은 불어오다 말고 멈추지만 상자를 가진 나는 걸어간다 오늘도 또다시 공원, 도서관으로 통하는 샛길이 보인다 나는
샛길을 따라
새로운 계단을 발견하고
내려간다 벌써 도서관에 도착하게 되다니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와서
뜨겁게 달아오른 난간을 붙들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요
상자는 말하지 않고 나는 당연히 공원으로 돌아간다
공원, 아니면 도서관이다
나무들
어린 나무들
그들 묘목들
거목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그들끼리 자라고 있다
텅 빈 공터인가 하고 보면 그것도 아닌
허허한 공원의 어느 지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가까운 식당을 찾아 헤맸다 그 상자는 무엇이냐고 사람이 물어봐 주지 않아서 우리는 계속 걷다가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한 입 두 입 마저 먹고 나온다던 책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물어보려다가 말고 사람의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은 것을 본다 더운 날씨네요 사람에게 말하고 알고 지내 온 사람이라 그런지 그렇군요 그렇네요 정말 덥습니다 사람은 펄럭펄럭 티셔츠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
벌거벗은 듯 허허한 공원의 어느 지점에서
너무 자세해지지는 말자고 생각한 묘목들이 가지 뻗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공원은 나무의 미래인데...... 상자는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이 어떻게 억지 바람을 불러일으키는가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거울을 보듯이
천천히
선풍기 머리가 도서관 옆 공원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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