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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림 - 건넌다

 

[민음사]양방향 (김유림 시집), 민음사 세 개 이상의 모형:김유림 시집, 문학과지성사

 

 

 돌다리를 두드리려면, 집에서 나와 냇물을 찾아가야 하고 물살이 세지 않아야 하고 예상치 못한 폭우가 내리지 않아야 한다 이 세 가지 경우를 전부 충족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가용이 있어야 하고 하다못해 자전거가 있어야 한다 돌다리를 두드리려면 얕고 잔잔한 냇물에 누군가 돌다리를 이미 놓았어야 하고 돌을, 되도록 평평한 돌을 이고 와서 소매와 바지를 걷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어야 한다 돌을 놓을 위치를 표시하고 표시할 수 없다면 짐작하고 어림잡아 이 물이 저 물이 아닌 걸 알아야 하고 직관이 뛰어나야 하고

 

 어렵다 물이 계속 흐르고

 물이 계속 흘러서

 

 잔챙이들 내려가고 잔챙이들 사라졌는데 월척이 떠내려오고 월척이 가면 한동안 잠잠하고 그래서 물고기에는 괘념치 말아야 하고 대담해야 한다 대담하려면 대담하게 자라야 하고 대담하게 자라려면 자라는 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데 여기서 우리는 너무 멀리 가지 않아야 하고 머물러야 하고 여기와 저기, 최단 거리로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너무 돌아가지는 않기로 하고

 

 물은 계속 흐르고 물은 계속 흘러서도

 

 넘치지 않아야 하고 장마철이 아니어야 하고 결국 기후와 지리의 영향을 받고 여기 한국이 아니라면 다른 나라라도 가서 돌다리를 시험해 보고 싶고 그래야 한다고 누가 말하지 않았어도 견딜 수 없다면 돌을 들어, 돌을 괴어, 일련의 돌들로 지도의 푸른 줄기를 가로지른 어떤 사람의 돌다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슬리퍼는 위험하니 신지 않고 아쿠아 샌들을 신고 물은 계속 흐르고 물이 계속 흘러서

 

 발을 유연하게 타 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도

 

 이끼를 잊지 않고 이끼를 조심해야지 이끼는 매끄럽고 이끼는 생물처럼 생생하고 그래, 이끼는 생물이 맞고 잊어버린 삶의 핵심을 다시 더듬으며 돌다리를 건너고 돌다리가 예상외로 튼튼하다면 발로 여러 번 건드려 보고 흔들어 보고 물살이 너무 연약하다 너무 부드럽다 잊고 있던 물살을 다시 느끼면 잊어버린 삶의 그것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자꾸 흘러가고

 

 잊어버리기도 전에

 

 흘러가고 나는 쉽게 마르는 아쿠아 샌들을

 괜히 뒤집어 물가의 돌에 기대어 두고, 하늘을 본다

 

 여기서 건너가면

 저기로 가겠지만

 

 주차장에 세워 둔 스쿠터를 생각하면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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