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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림 - 수영해 들어간다

 

[민음사]양방향 (김유림 시집), 민음사 세 개 이상의 모형:김유림 시집, 문학과지성사

 

 

 나는 너른 풀장 한가운데로 수영해 들어간다

 사람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뛰어들 수도 있고 발부터 적실 수도 있다

 낙엽이 떠다니는

 버려진

 풀장일 수도 있고

 내가 꿈꾸던 바로

 그 호화 수영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람에 쏟아진 낙엽으로

 얼룩진 풀장도

 꿈의 가장자리 정도는 적실 수 있다

 레인 끝까지 가려면

 물안경이 필요하고

 긴 머리칼을 묶을 머리끈도 필요하다

 가족과 함께 왔을 수도

 친구들과 함께 왔을 수도

 시시하게 너와 함께 왔을 수도 있다

 가장 시시한 건 나 혼자 왔을 때다

 가장 시시하지 않은 것도 나 혼자 왔을 때다

 만약 이것이 기나긴 불화 끝에 화해한

 부부의 여행이라면

 초가을에 큰 타월을 두르고 팁을 주어 가면서까지 샤베트를,

 서로의 입에 떠먹여 줄 테니까

 시간이 길다는 건 상대적인 거니까, 순식간에 만나고

 헤어진 하룻밤의 풀장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감각 속에서

 수영장은 깊이를 모르고

 넓어져서 나는 한가운데를 찾아

 나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이 바닥은 매우 쓸쓸하고 매우 차갑고 매우 단단하다

 어이, 누군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나는 눈을 뜨지 않고 수영해 들어간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기껏해야 초호화 감기에 걸릴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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