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개가 없는 마을에 정거장 같은 안개가 끼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안개를 그리워했다
안개를 낡은 속옷처럼 받쳐 입으며 그는 수치심을 던다
그는 한 꺼풀의 안개에 대해 기록한다
2
소년들은 창가에서 속손톱빛 안개를 내다본다 창문을 문질러도 안개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3
멀리 있는 것들을 미리 보여 주지 않아서 안심이 돼 사람들이 떨구고 간 손금들을 쓸어 담으며 청소부는 말한다 안개 속에서 코끼리가 섬같이 나타나도 슬퍼할 사람은 없어 애당초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수상함에 익숙해질 수밖에
4
무릎뼈를 동그랗게 오므린 채 텅 빈 욕조 속에 담겨 있는 기분이야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안개 속에서 익사해도 애도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세상은 고요히 흘러간다
5
자자, 나를 봐, 안개를 훔치고 싶다면 쉬... 조용히 해... 이렇게 안개를 착착 개켜서 여기에 담으면 된다고... 쉬... 마늘 머리처럼 푸석한 노파가 오래된 장롱의 문고리를 매만지며 말한다 그녀는 미쳤지만 미치지 않았다 안개에 약간의 과거를 떠넘기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다
6
아무 말이 오가지 않는다 누구나 각자의 과거를 기다리며 안개를 버티는데 그들은 한 올 한 올 풀려나가는 바지의 해진 밑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모두가 발소리를 죽이며
7
안개 속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굴뚝을 내려 놓고 숨을 고른다 그들은 타인의 굴뚝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이들은 발꿈치를 들고 총총히 뛰어간다
8
그대 떠나 버리고 나는 목 놓아 울었네, 울 때마다 그림자만 흥건해져요 안개 속에서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한 유행가가 흘러나오면 그제야 사람들은 누락된 굴뚝이라든가 빠진 손톱을 찾아 나선다 그건 모두의 이중생활일 뿐 밑줄이 사라져 핵심을 알 수 없는 손바닥과는 상관이 없다
9
안개 속에서 책갈피 같은 코를 가진 남자가 복권을 판다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는 요행을 바라서가 아니라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지 그런 점에서 복권과 안개는 닮았어 안개 속에서 남자는 복권을 나눠 주고 사람들은 녹슨 동전으로 은박을 긁어낸다
10
너덜너덜해진 안개의 끝 피에로 분장을 한 피에로가 딱딱한 오줌발로 안개를 적신다 그는 오줌을 피해 바짝 엎드린다 안개의 밑창은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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