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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 남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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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한 개씩 잡아먹는 작가는 땔감을 구하러 숲으로 간다 그것은 책 속의 남자에게 줄 먹이다

 

 책 속에는 축축한 나무 식탁, 나무 의자 그리고 나무 침대가 있다 나무 침대 위에 누운, 침대와 크기가 맞지 않는 나그네는 나무틀의 창문을 바라보며 창문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첫 번째 인상을 받는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잘려 나간 팔다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흘러 다니는 피

 작품 속에는 비가 내릴 수 없는데 작품 속 남자는

 비 같은 게 좀 그쳤으면 좋겠다며

 축축한 마룻바닥 위에 맨발로 서 있다

 

 숲으로 간 작가는 나무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채

 팔다리가 긴 나그네들을 기다린다

 어딘가 넘치거나 어딘가 모자란 나그네들만이 쓸모 있다는 것은

 어설픈 작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팔다리가 쓸데없이 긴 나그네가 지나간다

 뒤에서 덮쳐 책 속으로

 던져 버린다

 

 배가 고파

 나무를 물고 늘어지는 그림자의 이미지에 집중하던

 책 속의 남자는 나그네를

 침대에 눕히고 톱을 간다 호박색으로

 질린 나그네의 얼굴

 경험상 이것은 꿈이다, 라는 자각은 공포를 더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나그네는 창문을 본다 창문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인상은 누가 써먹은 공포이므로 나그네는

 저 창문을 열어도 바깥은 현실이 아니다, 라는 공포로

 창문에 관한 인상을 이어 나간다

 

 거의 다 된 가스통을 꺼내 두어 번 흔든 뒤 브루스타를 건성으로 툭툭 쳐 불을 켜듯

 작가는 침대에 맞지 않는 나그네를 잡아다 책 속의 남자에게 던져 주고 손을 턴다 그러니까

 이야기에는 얼마간 절실하게 짜고 치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어느 독자가 생각하는 반면

 

 독자들은 잘려 나간 팔다리들에 관한 깊은 지식을 얻는다,

 고 방울토마토를 잡아먹으며 작가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보는데

 

 침대에 눕히는 나그네

 경험상 이것은 꿈이 아니다, 라는 자각은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음침한 방

 축축한 마룻바닥과 피비린내

 책 속의 남자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조금 열어 빛이 바깥으로 조금 새어 나가도록 두는데

 새어 나간

 빛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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