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트 속에는 폴라로이드 같은 안개
안개 속에는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밤나무 숲과 국도가 있어요
나는 펼쳐진 노트 속으로 들어가 국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숲에선 사소한 불빛 하나 나타나지 않고
국도는 물속처럼 어둡고
가끔 죽은 고양이가 느낌표처럼 벌떡벌떡 일어서요
나는 흘러가는 노트 속의 산책자
내 기록들의 방관적 수취인
맨발로 일렁이는 국도 속을 걸어가지요
누군가 책장을 넘겨요
바람이겠죠
혼자 있는 교실엔 늘 바람이 불었어요
밤나무 숲이, 국도가, 내게 흔들려요
국도 저 끝에서 환한 전조등 성난 개들처럼 달려와요
수만의 바퀴들이 일제히 나를 밟아요
몸은 유리알처럼 부서져 느리게 어디론가 굴러가요
문득 가로등이 켜지고
지나온 길마다 붉은 융단이 깔려요
아이들이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쳐요
선생님이 휘파람을 불어요
바람이 나를 읽어요
바람이 나를 정신없이 넘겨요
아직 씌어지지 않은 페이지까지 읽어요
바람이 나를 지워요
나도 나를 자꾸만 지워요
너덜너덜해진 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 있는 걸까요
혼자 있는 교실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렸어요
나는 말랐다 젖었다
써졌다 지워지며
아무 데도 닿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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