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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영 - 은둔형 오후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유계영 시집, 문학동네 온갖 것들의 낮:유계영 시집, 민음사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유계영 시집, 현대문학

 

 

 맑은 날 비가 내리면 창밖을 봐주기를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도가 통했다는 것

 거울은 긴 팔로 방의 꼭짓점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며

 울고 웃는 한 사람을 지켜주려고

 

 거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뿐이지 그러나

 은둔자의 관심사는 오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둘은 오랜 우정을 쌓을 수 있다

 

 자나깨나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문득 극복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맑은데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은둔자는 거울을 떼어다 골목에 내놓았다

 

 가져가면 필요하시오 누구든 필요하시오

 환영은 아무나

 

 그는 방으로 돌아와

 네 개의 꼭짓점을 백오십팔 개씩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 위로 작고 부드러운 먼지들이 가라앉는다

 거울의 민감한 팔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둥둥 떠다니던

 사각형의 책상과 침대

 의외로 육각형인 강아지 얼굴

 인중이 뭉개질 때까지 콧물을 훔치게 했던 피크닉의 기억이

 바닥에 잘 붙어 있는 것을 바라본다

 

 허술한 태양이 자신의 꼭짓점을 놓칠 때

 맑은 날 비가 내렸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는 누군가 기도중이라는 의미일까

 저주가 기도의 내용으로 부적격하지 않다면

 

 우산의 어설픔 때문에 온 얼굴이 침 범벅인 행인들 사이

 거울은 빗방울을 속기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주워오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올

 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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