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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프랙털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 안희연 시집, 창비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시집, 창비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안희연 시집, 현대문학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서랍의날씨

 

 

 1

 아이들은 숲으로 간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새는 까맣게 잊고

 여기가 어디지 어디였지

 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2

 아이들은 들여다본다

 왜 저 사람은 물속에서 잠을 자고 있지?

 아이들은 긴 나뭇가지를 주워 와

 물에 젖은 구두를 건진다

 이 구두가 우리를 데려다줄지 몰라

 호주머니 속에서 새들은 힘차게 파닥거리고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구두를 따라간다

 

 3

 아이들이 침입한 숲은

 모처럼의 소동이 귀찮다

 눈앞에 없는 새만이 진짜일 거라고 믿는 것

 여름은 독 오른 실뱀을 풀어놓고

 눈에 안 보이는 여름이 있을 리 없다고 말한다

 여자는 하품을 하며 책장을 덮는다

 아이들은 영원히 잠든다

 숲이 다시 열릴 때까지

 

 4

 이 별은 나의 불행을 축으로 운행되고 있어

 스크린에선 한창 영화가 상영 중이다

 식탁에 앉아 혼잣말을 하던 주인공은

 입속으로 수저를 밀어넣다 말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오늘 낮에 읽은 점자책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새를 찾아 숲으로 간 아이들이 이미 새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눈먼 자가 딱 한번 눈을 뜰 때 영화는 총성과 함께 끝이 난다

 

 5

 꽤 괜찮은 불행이었어

 관객들은 만족한 듯 극장을 나서고 같은 시간

 남자는 불 속에 앉아

 불행을 관람하던 관객들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문장을 적는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그 문장을 지운다

 꼭 한방울의 기억이 공중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6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

 그가 노트에

 종말이라 적고 그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 같은

 

 7

 백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화들짝 놀란다

 불현듯 호주머니 속에서 새 한마리가 만져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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