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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하 - 입에 담지 못한 손은 꿈에나 담아야 해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시집, 문학동네 [달]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이원하) (마스크제공), 단품 신춘문예 당선시집(2018), 문학세계사

 

 

 나요

 오랜 미련에 색이 남아 있다면

 손바닥으로 전부 문지를 거예요

 

 왜냐하면요

 그 미련들은 현재의 나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문지르다가 손에 색이 옮겨붙으면

 새끼손가락만 빼고 다 버릴 거예요

 

 약속은

 현재에서도 살아야 되니까요

 꿈자리처럼 지켜야 하니까요

 

 달아나려는 밤을 붙잡았더니

 가로등이 할 일을 시작합니다

 가로등이 만든 길을 흰 눈이 걸어갑니다

 걸음걸이가 내게 속삭입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봅니다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바람이 먼저 들었는지 아무 소리도

 

 없습니다

 한눈팔지 않았는데, 없습니다

 난 괜찮을 겁니다

 

 공백은 언제고 밉지 않으니까요

 공백은 언제고 색이 없느라 빛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