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전

[육조단경] 참다운 참선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는 무념 무상 무주라는 세 기둥으로 되어 있다. 혜능은 먼저 무념 쪽에서 이것을 설명해 간다. 사실을 말하면, 무념이라는 것도 유념에 대한 대증요법으로서 참으로 무념이라면 무념이라 말할 필요조차 없다. 북종을 대표로 하는 이제까지의 선은 그러한 무념에 지나치게 치우쳐 왔다. 좌선도 역시 그렇다. 좌선이란 단순히 입을 다물고 마음의 움직임을 제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리하여 혜능은 좌선에 아주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좌선이야말로 그를 조상으로 하는 남종선의 기초가 된다. 주목되는 것은, 여기서 보이는 좌선의 정의는, 다음에 계속해서 언급되는 삼신 삼귀 삼보 사홍서원을 비롯해서 입멸의 대목에서 이뤄지는 삼과법문 등과 함께, 그것들을 정리한 수첩 비슷한 형태로 돈황 문서 속에 몇 권 발견되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는 티베트어로 대역되는 것까지 있어서, 남종선의 폭넓은 전파를 알려 주고 있다.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단번에 깨침과, 점차로 깨달음을 모두 세우니, 생각이 없음을 종으로 삼으며, 모양이 없음을 본체로 삼고, 머무름이 없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오,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을 떠난 것이며,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순간순간의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순간순간 서로 이어져 끊어지는 일이 없느니, 만일 한순간이라도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은 곧 육신을 떠난다.

 한순간 한순간의 생각의 흐름 속에 일체의 법 위에 머무르는 일이 없느니, 한순간이라도 생각이 머무르게 되면, 생각마다에 머무르는 것이 되어 곧 얽매임이 된다.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선지식들이여, 밖으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만일 능히 모양을 떠나게 되면, 성품의 본체는 청정해진다. 이런 까닭에 모양이 없는 것을 본체로 삼느니라, 어떤 환경에도 물들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생각이 없는 것이라 하니, 자기 마음 속에서 경계를 떠나 있기 때문에, 법에 대해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일백 가지 모든 사물을 생각지 않고서 생각을 모조리 제거치 말라. 한 생각이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태어날 수 없게 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조심하여 법의 뜻을 쉬도록 할 지니, 스스로 잘못되는 것도 이렇거니와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보지 못하며, 또 경전의 가르침을 비난하니, 이런 까닭에 생각없음을 받들어 종지로 삼는다. 인연에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내고, 그 생각 위에 문득 그릇된 판단을 일으키게 되므로, 일체의 번뇌와 망념이 이로부터 생긴다. 

 그래서 이 교문은 무념을 받들어 종지로 삼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소견을 떠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일 생각함이 없으면 무념 또한 내세울 것도 없다.

 무란 무엇이 없다는 것이며, 염이란 또 무엇을 생각하는 건가. 없다 함은 대립된 두 상의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곧 생각의 본체이고, 생각은 곧 진여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면, 곧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마음이 움직이지만, 어떤 경계에도 물들지 않고 언제나 자재한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밖으로는 능히 모든 사물의 모양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제일의 뜻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선지식들이여, 이 법문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청정함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으니, 만일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하면, 마음은 원래가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므로 들여다볼 것이 없다. 만일 청정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원래 청정함에도 망념 때문에 진여가 덮여 있는 것이므로 망념을 떠나면 본성은 청정한 것이다.

 자기의 본성이 원래 청정한 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일으켜 청정한 것을 본다고 한다면, 도리어 청정에 대한 망념을 낳게 된다.

 망념은 일정한 곳이 없으므로 그것을 본다는 것이 곧 허망한 것임을 알라. 청정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청정하다는 모양을 만들어 두고 이를 공부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기 본성을 가로막아 도리어 청정함에 얽매이게 된다.

 만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미혹한 사람은 자신의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입만 열면 곧 남의 옳고 그른 것을 말하여 도와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그래서 마음을 보고 또는 청정을 본다는 것은 도리어 이것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된다.

 지금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이 법문에서는 무엇을 좌선이라 이름하는가. 이 법문에서는 일체 장애가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이며, 안으로 본성을 깨달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이다.

 무엇을 이름하여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을 선이라 하고, 안으로 본성이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가사 밖으로 모양이 있더라도 안으로 본성이 어지럽지 않으면, 마음은 본래대로 청정해 있고 자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경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접촉하게 되고, 접촉하게 되면 곧 어지럽게 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다. 밖으로 모양을 떠난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다. 밖으로는 선하고 안으로 정하기 때문에 선정이라 이름한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즉시 홀연히 깨달아 본심을 도로 찾는다고 했고,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원래 본래 근원인 자성은 모름지기 청정해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이여, 본성이 원래부터 청정함에 눈뜨라. 스스로 닦고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 본성의 법신이다. 법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부처님의 행이요,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