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비판에 대해 우리 중관자는 아래에 대답한다. 먼저 처음에 그대가
만일 어느 곳에도, 어떤 것에도 본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대의 말도 본체를 갖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본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는 말하겠다.
만일 내 말이 그 질료인과 보조인을 합친 전체 속에도, 그것들과 독립된 것으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물에는 본체가 없는 것이 되므로, 공성은 증명되지 않는가.
만일 내 말이 질료인, 즉 모든 원소가 집합한 것이나, 혹은 모든 원소의 하나하나 속에도 존재하지 않고, 보조인인 가슴통 목구멍 입술 혀 이뿌리 뒤입천장 코 앞입천장 등이나, 또 생각 속에도 없고, 두 인을 합친 전체 속에도, 질료인과 보조인의 전체와는 따로 독립된 것으로서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 까닭으로 해서 본체를 갖지 않는 것이 되고, 본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본체가 없기 때문에 이 내 말이 공인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내 말이 본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내 말이 공이기 때문에 모든 것의 공성은 타당치 못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사물이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공성의 뜻이라고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 다른 것에 의한 존재에는 본체가 없다.
그대는 '사물이 공이다'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확인하지도 않고, 내 말에 본체가 없으므로, 사물의 본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이 경우에는 사물이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공성이다. 어째서인가. 본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른 것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은, 본체를 가지고 존재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에는 자기 존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냐 하면, 그것들은 질료인과 보조인에 의존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물이 본체로서 존재한다면, 질료인과 보조인과를 없애 버려도, 그것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같은 경우에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물은 본체가 없는 것이며, 본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내 말까지도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본체를 갖지 못하고, 본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 말하게끔 된다.
그러나 수레라든가 병이라든가, 배 같은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본래는 공이기는 하지만, 나무와 풀과 흙을 운반하기도 하고, 꿀과 물과 우유를 담기도 하며, 추위와 바람과 더위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각자의 역할을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 말도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본체를 갖지 않지만, 사물에 본체가 없는 것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내 말이 본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며, 그것이 공이기 때문에 그 말에 의해 모든 것의 본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변화가 다른 변화를 방해하고, 환인이 스스로의 마술에 의해 만든 다른 환인을 방해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부정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변화인이, 또 한 명의 변화인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고, 마술사에 의해 만들어진 환인이 같은 마술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환인이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을 방해할 경우에는, 방해를 받는 변화인도 공이요, 방해하는 쪽도 공이다. 방해를 받는 환인도 공이요, 방해하는 쪽도 공이다. 꼭 그것과 같이, 내 말도 공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의 본체를 부정할 수가 있다. 그것에 대해 그대가, 내 말은 공이기 때문에 모든 것의 본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그때 그대가 말한 여섯 가지 한계를 같은 의론이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로 부정된다. 사정이 이러한 이상, 내 말은 모든 것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며, 공이 아닌 것도 아니다. 또 모든 것도 공이 아닌 것도 아니다. 또 그대가
이에 반해, 만일 이 말이 본체가 가지는 것이라면, 그대가 앞에 주장한 것은 깨어진다. 그대의 두 개의 명제에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어, 그것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하련다.
이 말은 본체를 갖는 것이 아니므로 내게 이론의 파탄은 없다. 또 불일치성도 없으며 특별한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
먼저 내 말은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본체가 주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앞에서, 본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이다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나의 이 말이 공이고, 다른 모든 것도 공이기 때문에 거기에 불일치는 없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말은 공이 아니고 다른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한다면, 거기에 불일치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으므로 불일치는 없다. 그리고 이 말은 공이 아니고, 한편 다른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하는 식의 불일치는 없는 것이므로, 말은 공이 아니고, 한편 다른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하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특별한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그대가 내게 이론의 파탄과 불일치성이 있고, 나는 특별한 이유를 말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앞에서 그대가 말한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가, 위에서 말한 불일치의 해결을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고 그대는 생각하지만, 그것도 타당치 않다. 그 까닭은 그 경우에는 실재하는 소리에 의해 생겨나게 될 소리의 금지가 행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하련다.
그대가 암시한 하지말라고 하는 소리처럼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리에 의해 소리를 정지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의론의 비유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소리를 내지 말라하고 소리를 내면서 소리를 억제하는 것처럼, 이 공인 말은 공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냐 하면, 이 비유에서는 소리에 의해 소리가 그쳐지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은 본체를 갖지 않으며, 본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선가.
까닭인즉, 본체를 갖지 않은 것에 의해, 만일 본체를 갖지 않은 것이 억제되는 것이라면 본체를 갖지 않는 것이 부정되는 것이므로, 본체를 갖고 있는 것이 증명되어지리라.
소리를 내지 말라라는 소리에 의해 소리가 억제되는 것처럼, 본체를 갖지 않은 말에 의해, 만일 본체를 갖지 않은 것이 억제된다면, 그때에야말로 이 비유는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체를 갖지 않은 말에 의해 사물의 본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만일 본체를 갖지 않은 말에 의해, 본체를 갖지 않은 것이 부정된다면 본체를 갖지 않은 것이 부정되므로, 바로 사물은 본체를 가지는 것으로 될 것이며, 본체를 가지므로 공이 아닌 것으로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물이 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공인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유로는 되지 않는다.
혹은, 어느 사람이 변화한 여자를, 이것은 실재 여자라고 오인하고 있는 것을, 다른 변화한 사람이 부인한다고 하자. 우리의 경우도 그와 같은 것이다.
또 예를 들면, 어느 사람이 여자로서의 본체가 없는 여자를, 이것은 정말 여자라고 오인한다고 하자. 그 변화한 여자를 그같이 오인하는 까닭에 그에게 욕망이 생긴다고 하자. 여래나 혹은 여래의 제자에 의해 변화인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여래의 신비스런 통어력이나 혹은 여래의 제자의 신비스런 통어력에 의해, 그의 그 같은 오인을 물리친다고 하자. 마치 그것과 같이, 변화인과도 같은 공인 내 말에 의해, 변화한 여자와도 같이 본체를 갖지 않는 모든 것에,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해가 물리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방금 말한 비유야말로 공성을 증명하는 데 타당한 것이 되지만, 그대가 암시한,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라고 하는 또 하나는 그렇지 않다.
이 그대가 제출하고 있는 이유는 그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소리에 실재성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 우리 것은 세간의 상식을 승인하지 않고서 의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처럼이라고 하는 비유에 들어 있는 이유는, 그 자체가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본체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그 소리도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본체로서의 실재성이 없기 때문에, 그대가 이 경우, 실재하는 소리에 의해 생겨나게 될 소리가 억제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모순되어 있다.
또 우리들은 세간의 상식을 승인하지 않고, 즉 상식을 무시해버리고,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참으로 상식에 따르지 않고 교법을 말할 수는 없다.
세간의 상식을 쓰지 않고는 최고의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최고의 진실에 따르지 않고서는 열반을 깨달을 수 없다. 라고 말한 것처럼. 그러므로 내 말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공이며, 모든 것이 본체를 갖지 않는 것은 상식과 최고의 진실 들에 있어서 타당한 것이다.
또 그대가
부정에 대한 우리들의 부정도 마찬가지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이처럼 형식에 있어서 성립되지 않는 그대의 주장이지 우리의 주장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리라.
만일 내가 어떤 주장을 한다면, 이 같은 잘못이 내게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주장이란 것이 없으므로 잘못도 내게는 없다.
만일 내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주장명제의 형식을 채용하고 있는 것이 되므로, 그대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잘못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어떠한 주장도 없다. 즉 모든 것이 공이며, 절대적으로 한정이며, 본성으로서 고적인 때에 어떻게 주장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주장명제의 형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또 주장명제의 형식을 취하는 것에 얽매이는 잘못이 있겠는가. 그 경우, 내가 주장명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므로, 내게야말로 잘못이 있다고 그대가 말한 것은 옳지 않다.
또 그대가
설령 그대가 먼저 지각에 의해 사물을 인식하고 나서 그 본체를 부정한다 하더라도,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인 그 지각은 그대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다.
추리 중언 비정, 또 추리와 증언에 의해 증명된 대상과 비유에 의해 비정된 대상도, 지각의 비판에 의해 이미 대답되고 있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말하겠다.
만일 내가, 지각이나 그 밖의 인식 방법에 의해 무언가를 인식한다면, 나는 긍정적으로 주장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주장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므로 그대가 말하는 것은 내게 대한 비난이 되지 않는다.
만일 내 지각 추리 비정 증언이라는 네 가지 인식 방법의 전부나, 혹은 네 가지 인식 방법 중 어느 하나에 의해, 무엇인가의 대상을 인식한다고 한다면, 그것에 의해 혹은 긍정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고, 혹은 부정적인 부정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대상도 인식하는 일은 없으므로, 내게는 주장이나 부인하는 일은 없다. 이같은 경우에는 설령 그대가 지각을 비롯한 인식 방법의 그 어느 것인가에 의해 사물을 인식한 뒤에 부인을 한다 해도, 그것들의 인식 방법도 그대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인식 방법에 의해 이해되는 대상도 없지 않은가 하고 그대가 말한 것은, 내게 대한 비난으로는 되지 않는다.
다시,
그것과 반대로, 만일 그대에게 있어서, 이것저것의 대상이 인식에 근거해서 확립된다고 한다면, 그대에게 있어서 그들 인식은 어떻게 확립되는가를 말하라.
반대로 만일, 헤아림을 받는 것이 헤아림에 의해 확립되듯이, 이것저것의 인식 대상은 인식에 근거해서 확립된다고 그대가 생각하고 있다면, 이번엔 그 지각 추리 비정 증언이라는 네 가지 인식은 무엇에 근거해서 확립되는가. 우선 만일, 인식은 또 하나의 인식을 기다리지 않고 확립된다고 한다면, 사물은 인식에 근거해서 확립된다고 하는 주장은 파탄을 가져온다. 그러나
또, 만일 인식이 다른 인식에 의해 성립된다면, 그 과정은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또, 인식의 대상은 인식에 의해 확립되고, 그 인식은 다른 인식에 의해 확립된다고 그대가 생각한다면, 그 과정은 이리하여 무한으로 소급되고 만다. 무한소급에 빠지는 것은 어떤 잘못으로 되느냐 하면
그 경우 최초의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중간의 것도, 최후의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무한소급에 빠졌을 때에는, 최초의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어째서냐 하면, 그들 인식은 다른 인식에 의해 확립되고, 뒤의 것은 또 다른 인식을 필요로 하는 까닭으로 최초의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최초의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떻게 중간 것과 최후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 인식이 다른 인식에 의해 확립된다고 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것이다.
혹은 그들 인식이 다른 인식을 기다리지 않고 확립하게 되면, 그대의 이론은 파탄된다. 거기에는 불일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는 특별한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그들 인식은 다른 인식 없이 스스로 확립되고, 다른 한편 인식의 대상은 인식에 의해서만 확립된다고 그대가 생각한다 하자. 그 같은 경우에는, 사물은 인식에 의해 확립된다고 하는 그대의 이론은 깨지고 만다. 어떤 것은 인식에 의해 확립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불일치도 생겨난다. 어느 것은 인식에 의해 확립되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사태를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대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생각 방식도 타당하지 못하다.
이 점에 대해, 대론자가 반박한다.
참으로 인식은 자체와 다른 것을 함께 확립시키는 것이다. 즉 시송에 말하는, 마치 불이 자체와 다른 것을 함께 비추듯이, 인식이란 것도 자기와 남을 함께 확립시킨다. 마치, 불이 그 자체와 다른 것을 함께 비치듯이, 인식은 그 자체와 다른 것을 함께 확립시킨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대답한다.
이 비유는 적용이 적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불은 스스로를 비추지는 않는다. 어둠 속에서 병이 보이지 않듯이 불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과 같이, 인식은 자체를 확립시키고, 또 다른 것도 확립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 적용이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불은 스스로를 비추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처음에 불에 의해 비추어지지 않은 때에는, 어둠 속의 병은 인식되지 않지만 뒤에 비추어지게 되면 인식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처음에 비추어지지 않은 불이라는 것이 어둠 속에 있었다면, 뒤에 불이 비추는 기능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불은 자체를 비추게도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이 생각도 타당하지 않다. 다시,
그대가 말하듯이, 만일 불이 자체를 비춘다면 불이 다른 것을 태우듯이 자체도 태우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의 말처럼, 불이 다른 것을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자체를 비춘다고 한다면, 다른 것을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체까지도 태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는 않다. 불이 다른 것을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체까지도 비춘다고 그대가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시,
또 만일 그대가 말하듯, 불이 자타를 함께 비춘다고 한다면, 불이 자타에 대해 작용하듯, 어둠도 자타를 함께 감추게 될 것이다.
또 그대의 의견대로, 불이 자타를 함께 비춘다고 하면, 이번엔 불의 적대자인 어둠도 자타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는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이 자타를 함께 비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시,
어둠은 빛 그것 속에도 없고, 다른 빛이 있는 곳에도 없다. 그때 어둠을 없애는 것인 등불은 어떻게 비추는 역할을 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는 어둠은 불 속에도 없고, 불이 있는 곳에도 없다. 한편 조명이란 어둠을 제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 속에는 어둠이 없고, 불이 있는 곳에도 어둠은 없으므로, 그때 불은 어떻게 어둠을 없앨 수 있을까 - 그 어둠을 없앰으로 해서 불은 자타를 함께 비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 대론자가 반박한다. 이와 같이 불 속에도 어둠은 없고, 불이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는 이유로, 불이 자타를 비추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불이 생겨날 때에 어둠은 없어진다. 그러므로 불 속에도 어둠은 없고, 불이 있는 곳에도 어둠은 없다. 까닭인즉, 불은 생겨날 때에 그 자체와 다른 것과의 둘을 비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대답한다.
불은 생겨날 때에 비추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의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은 생겨날 때에 어둠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은 생겨날 때에 그 자체와 다른 것과를 비춘다고 하는 의론은 타당치 않다. 어째선가. 실로 생기는 도중에 있는 불은, 아직 어둠에 도달해 있지 않고, 도달해 있지 않으므로 결코 어둠을 물리치지 않는다. 그리고 어둠이 제거되지 않으므로 조명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다시,
만일 빛이 어둠에 도달하지 않고 어둠을 물리친다면, 여기에 있는 빛이 세계의 모든 어둠을 없애게도 될 것이다.
만일, 불은 어둠에 도달하지 않고서도 어둠을 물리친다고 그대가 생각한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불이, 이것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세계에 있는 모든 어둠을 물리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실제로는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은 어둠에 도달하지 않아도 어둠을 물리친다고 인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시,
만일 그 스스로 인식이 성립된다면, 그대에게 있어서, 인식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고서 인식은 성립하게 된다. 스스로 성립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불처럼 인식도 스스로 성립된다고 생각한다면, 인식이라는 것은 인식 대상을 기다리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스스로가 성립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로, 만일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성립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대론자는 이 점에 대해 반박한다. 만일 인식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어떤 잘못이 있는 것인가. 이것에는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그대에게서, 인식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인식이 성립한다면, 그때에는 그 인식은 어떠한 것의 인식으로도 될 수 없다.
만일 인식이 인식의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성립된다면, 그때에는 그 인식은 어떠한 것의 인식도 아니다라는 것과 같은 잘못이 있다. 만일 반대로 어떤 것의 인식이라면, 그때에는 인식 대상을 기다리지 않고 인식이 생기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것과 반대로, 그것들이 대상에 의존해서 성립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잘못이 있느냐 하면, 이미 성립해 있는 것을 다시 성립시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존재해 있지 않은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식 대상에 의존해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미 성립해 있는 네 가지 인식을 다시 성립시키는 것이 된다. 어째서냐 하면, 사물이 아직 성립해 있지 않을 때에,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있지도 않은 제바달다라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미 성립해 있는 것을 다시 성립시키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한 번 한 것을 다시 하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만일 모든 경우에, 인식이 인식의 대상에 의존해서 성립해 있다면, 인식 대상은 인식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하는 것이 된다.
만일 인식이, 인식의 대상에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이번엔 인식 대상은 인식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인식 대상은 인식을 성립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립된 것이 성립시키는 것을 성립시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그러나 만일 인식의 대상이 인식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해 있다면, 그대에게 있어서 인식의 존재는 무엇에 소용되는가 - 인식에는 어떤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이미 성립해 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인식에 의존하지 않고 인식 대상이 성립해 있는 것이라면, 그때 그대는 인식의 성립을 애써 참아서 무엇에 쓰려는 건가. 왜냐하면,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목표 즉 인식 대상의 성립을 위해 찾게 되는 것인데, 그 목표인 인식 대상은, 인식 없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인식에 의해 무엇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반대로, 그대에게 있어서, 인식은 반드시 인식 대상에 의존해서 성립되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경우에는, 인식과 그 대상과의 관계는 반드시 역전되고 만다.
또 앞에 지적된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 인식 방법은 인식 대상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그대가 생각한다면, 그 같은 경우에는 그대에게 있어서, 인식 방법과 그 대상 관계는 역전한다. 인식 방법은 인식 대상에 의해 성립되게 되는 것이므로 인식 대상이며, 인식 대상은 인식 방법을 성립시키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인식 방법이 되게 된다.
또, 그대에게 있어서, 인식의 성립에 의해 인식 대상이 성립하고, 동시에 인식 대상의 성립에 의해 인식이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함께 성립하지 않게 된다.
또 인식 대상은 인식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인식이 성립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고, 동시에 인식은 인식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인식 대상이 성립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라고 그대가 생각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그대에게 있어서는 그 둘이 다 성립되지 않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즉 만일, 인식 대상은 인식에 의해 성립되고, 또 위의 것은 앞의 것인 대상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뒤의 것은 어떻게 해서 앞의 것을 성립시키겠는가.
왜냐하면, 인식 대상이 인식에 의해 성립되고, 동시에 그 인식은 그 대상에 의해 성립되어야 한다고 하면, 대상이 아직 성립해 있지 않을 때에는, 인식은 아직 그 원인이 성립해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성립해 있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대상을 성립시킬 수 있겠는가.
만일 인식이 대상에 의해 성립하고, 또 뒤의 것은 앞의 것인 인식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위의 것은 어떻게 하여 앞의 것을 성립시킬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인식은 대상에 의해 성립되고, 동시에 그 대상은 그 인식에 의해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인식이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대상은 아직 그 원인이 성립해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성립해 있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인식을 성립시킬 수 있겠는가.
만일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생겨나고, 또 그 아들에 의해 그 아버지가 생겨난다면,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생겨나게 하는가를 말해 보라.
예를 들면,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생겨나고, 동시에 그 아버지는 그 같은 아들에 의해 아버지로 되는 것이다 하고 누가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경우, 누가 누구에 의해 생겨나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말하라. 바로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식에 의해 대상은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 인식은 이같은 대상에 의존한다고 그대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경우 그대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이 어느 쪽에 속해 성립되게 되는 것인가.
그때에,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아들인가를 그대는 말해 보라. 그들 둘이 함께 아버지와 아들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되므로, 거기에 우리들의 의심이 생긴다.
위에 말한 아버지와 아들과의 두 사람 중, 어느 것이 아들이고 어느 것이 아버지인가. 그들은 둘이 다 생겨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또 생겨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특징도 갖고 있다. 여기서 그때에 어느 쪽이 아버지이고, 어느 쪽이 아들인가 하는 의심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그 인식과 대상과의 관계도 전혀 같은 것인데, 그때, 어느 쪽이 인식이고 어느 쪽이 대상인가. 왜냐하면, 이들 둘은 함께 성립시키는 것이므로 인식 방법인 것이며,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 대상이다. 그때, 어느 쪽이 인식이며 어느 쪽이 대상인가 하고 우리들의 의심이 생긴다.
위에 말한 아버지와 아들과의 두 사람 중, 어느 것이 아들이고 어느 것이 아버지인가. 그들은 둘 다 생겨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또 생겨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특징도 갖고 있다. 여기서 그때에 어느 쪽이 아버지이고, 어느 쪽이 아들인가 하는 의심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그 인식과 대상과의 관계도 전혀 같은 것인데, 그때, 어느 쪽이 인식이고 어느 쪽이 대상인가. 왜냐하면, 아들 둘은 함께 성립시키는 것이므로 인식 방법인 것이며,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 대상이다. 그때, 어느 쪽이 인식이며 어느 쪽이 대상인가 하고 우리들의 의심이 생긴다.
참으로 네 가지 인식은 독립해서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서도 아니며, 그 자신과는 별개인 인식에 의해서도 아니고, 대상에 의해서도 아니다. 혹은 우연히 원인 없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지각은 그와 같은 지각에 의해, 추리는 그같은 추리에 의해, 비정도 그같은 비정에 의해, 증언도 그 같은 증언에 의해, 각각 독립해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또, 지각은 추리 비정 증언에 의해, 추리는 지각 비정 증언에 의해, 비정은 지각 추리 증언에 의해, 증언은 지각 추리 비정에 의해라고 하듯이,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또 지각 추리 비정 증언이, 각각 별개인 지각 추리 비정 증언에 의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또 각각의 인식 자신의 대상과 다른 인식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것의 전체나, 혹은 하나하나에 의해서도 아니다. 또 우연히 성립하지도 않는다. 다시 위에 말한 모든 원인 중의, 혹은 스물, 혹은 서른, 마흔, 스물여섯 등으로 말하는 것의 집합에 의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인식의 대상은 인식에 의해 이해되는 것이므로, 한쪽에는 인식 대상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 인식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인 인식이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앞에 그대가
사물의 부위에 통한 사람들은, 선한 모든 사물에는 선의 본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밖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각각 본체의 배분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 말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말하겠다.
만일 사물의 부위에 통한 사람 둘이, 선한 모든 사물에는 선의 본체가 있다고 한다면, 사물과 그 본체는 그와 같이 따로따로 표현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물의 부위에 통한 사람들이, 선한 모든 사물에는 선의 본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본체를 사물과 구별하여, 그대는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그 선의 본처요, 저것이 선인 모든 사물이다. 이것이 그 좋은 인식이요, 저것이 좋은 인식의 본체다라고 말하듯이,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와 같이 구별해서 경험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는 각각 규정된 것과 같은 본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만일 선의 본체가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난다면 그것은 타자적 존재이다. 그런데 어떻게 선인 모든 사물의 자기 존재로 될 수 있겠는가.
만일 선인 모든 사물의 본체가 질료인과 보조인의 모임에 의해 생겨난다면, 그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어떻게 선인 모든 사물의 본체 자기존재가 되겠는가. 악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꼭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선인 모든 사물에는 선의 본체가, 그리고 악과 그 밖의 것에는 악과 그 밖의 본체가 규정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혹은 그 선인 모든 사물의 본체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생긴다면, 종교적 생활 태도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아무것에도 의하지 않고, 선인 모든 사물에 선의 본체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악인 모든 사물에는 악의 본체가, 선으로도 악으로도 결정되지 않는 모든 사물에는, 선악 어느 것으로도 결정되지 않는 본체가 생긴다라고 그대가 생각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비종교적인 생활 태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형태에 있어서는,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라고 하는 원리가 배제되고 말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의 거부는,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에 대한 지견의 거부로 된다. 원래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엔 그 지견은 있을 수 없고,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에 대한 지견이 없을 때에는 사물의 참된 지견도 있을 수 없다. 실로 세존께서는 수행하는 사람들이여,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를 보는 사람은, 사물의 참을 본다고 말했던 것이다. 사물의 참된 지견이 없으면 종교적 생활도 없게 된다.
혹은,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를 버리는 것은, 고가 생기는 원인을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란 것은, 고가 생기는 원인을 가리키기 때문에, 고의 원인을 부정하면 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 원인이 없을 때에 그 고가 어떻게 해서 생기겠는가. 고를 인정하지 않고 그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며, 고의 지멸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즉 고의 원인이 없다면 무엇을 끊어 없앰으로 해서 지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고의 지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멸에 이르는 도의 부인이 된다. 즉 고의 지멸이 없다면, 고의 멸에 이르는 도는 무엇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이겠는가. 이렇게 하여 네 가지 높은 진리가 없는 것이 되고, 그것들이 없으면 출가 생활의 결과도 있을 수 없다. 진실을 봄으로 해서 출가 생활의 결과가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 생활의 결과가 없으므로 종교적 생활도 없는 것이 된다.
또, 도덕도 비도덕도 없어지게 되고, 세간의 관행도 있을 수 없다. 본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항상적이고, 항상적이기 때문에 원인을 갖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다른 것에 따르는 생기를 부인하는 그대에게는 어떠한 잘못이 따르느냐 하면, 도덕도 없어지고, 비도덕도 없어지며, 세간의 관행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다른 것에 의해 생기한 것인만큼, 다른 것에 의해 생기가 없을 때에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 또 본체를 갖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 것, 즉 원인을 갖지 않는 것, 항상적인 것일 것이다. 어째선가, 원인을 갖지 않는 것은 항상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한 생기를 부정하면 그것은 비종교적 생활이란 것이 되고 만다. 또 불교인 자신의 정설에 배반하게 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말했으니까. 그런데 그대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은 항상 본체를 가지는 것이므로, 항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리하여 악한 것, 선한 것, 선악 어느 것으로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출리로 이끄는 것 등에 대해서도 잘못이 있다. 그리고 그대에게 있어서는 모든 제약 받는 것이 제약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선한 모든 사물에 대해 말해 온 생각 방법과 같은 것이 악한 것에도 적용되며, 또 그와 같은 생각 방법은 선과 악 어느 것으로도 결정되지 않는 것, 출리로 인도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그대에게 있어서는, 이들 모두 피제약자는 무제약자로 되고 만다. 어째선가. 원인이란 것이 없을 때에는 사물이 생기고, 존속하고, 허물어지는 일이 없다. 생기 존속 괴멸이 없는 때에는 피제약자인 것의 특징이 없는 것이므로, 모든 피제약자는 무제약자와 같이 되고 만다. 이 경우에, 선한 모든 사물에는 본체가 실재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은 공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그대가
만일 모든 사물에 본체가 없다면, 본체를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이 명칭 자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응하는 실재물을 갖지 않는 명칭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는 말하리라.
이 경우, 본체를 갖는 것이라고 하는 명칭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만 그대는 이 같은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이 경우 본체를 갖는 것이라고 하는 명칭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대에 의해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본체라고 하는 것에 실재하는 명칭이 있을 때에만, 그 본체는 실재하게 된다. 실재하지 않는 본체에 실재하는 명칭이 있을 리가 없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명칭이 실재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사물에 본체는 없는 것이므로, 그 명칭도 또 본체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공이요, 공인 까닭에 실재하지 않는다. 그럴 때 그대가, 명칭이 실재하기 때문에 본체는 실재한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 명칭은, 존재하는 것에 붙여지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붙여지는 것인가. 존재하는 것에 있든,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든, 그대의 의론은 어느 것이라도 파탄된다.
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명칭은, 도대체 존재하는 것에 있는 건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는 건가. 그 명칭이 존재하는 것에 있든,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든, 어느 것이고 그 주장은 깨어진다.
그 중에서 먼저, 존재하는 것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칭이 있다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름 붙인다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명칭에는 실재하는 본체가 있다고 하는 그대의 주장은 깨어진다.
또, 모든 것이 공이란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그대의 이 비난은 그 대상으로 되는 주장을 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의 공성을 자세히 증명했다. 그때 이미 명칭동 공한 것임을 설명했다. 그대는 명칭은 공이 아니라고 고집하여, 만일 사물에 본체가 없다면, 본체를 갖지 않는 것이라는 명칭도 없으리라고 반박을 했었는데, 위에 말한 이유로 그대의 이 비난에는 목표가 되는 주장이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명칭이 실재한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앞서 그대가
또 본체는 있지만, 그것은 모든 사물에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모든 사물과는 별개로 그 본체가 속해 있음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말하겠다.
또 본체는 있지만, 그것은 모든 사물에는 없다고 하는 것을 전체로 해서 말하고 있으나, 그 같은 것은 전체가 되지 않는다.
고 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물에 있는 본체만을 부정하는 것도, 모든 사물과는 별개인 어떤 것인가에 본체가 있음을 승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만일 모든 사물이 본체를 갖지 않는다면, 이번엔 모든 사물과는 별개인 다른 무엇에 본체가 있는 것인가.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그대의 비난은, 본문제를 멀리 벗어나 있는 것으로 비난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대가
집에 병은 없다고 하는 형식의 부정은 본래 병이란 것이 존재해 있을 때에만 행해진다. 따라서 그대에게 있어서, 본체가 있을 때에만 그 부정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말하련다.
만일, 부정은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공성은 시인되고 있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사물에 본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존재해 있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부정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한편으로 그대가 모든 것에 본체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모든 것에 본체가 없다고 하는 것의 존재가 시인될 것으로 된다. 그대의 말대로, 그 부정이 사실 존재하고, 그리고 모든 것에 본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부정되어 잇는 것이므로, 도리어 공성의 존재는 시인되어 있는 것으로 된다.
혹은, 그대가 공성을 부정하고, 그리고 그 공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부정은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서만 있다고 하는 그대의 이론은 허물어진다.
거꾸로, 그대가 모든 것의 본체가 없는 것, 즉 공성을 부정하면서, 그리고 그 공성이 없다고 한다면, 존재하는 것의 부정이 있을 뿐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의 부정은 없다고 하는 그대의 주장은 깨어진다.
또, 나는 무엇인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또 부정되는 것이 무엇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정한다고 하는 이 항의는 그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를 부정한다면, 그대는 그렇게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은 아무것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공으로서 부정되어야 할 것도, 부정하는 것도 없는 마당에, 그대가 나를 보고 부정한다고 하는 것은, 그대가 만들어 낸 엉뚱한 항의인 것이다. 또 그대가
만일 그 본체가 없다면, 그대는 그 말로써 무엇을 부정하는 건가.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의 부정은, 새삼스레 표현할 것도 없이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하련다.
표현을 기다리지 않고 성립해 있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부정하는 표현은 있을 수 없다고 그대는 말했지만, 이 경우,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알려 주는 것으로, 그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부정은, 말이 없더라도 성립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은 본체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내 말은 무슨 역할을 한단 말이냐 하고 그대는 말한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말하겠다.
모든 것은 본체를 갖지 않는다라고 하는 이 말은, 실로 모든 것을 본체가 없는 것으로 고쳐 만드는 것이 아니고, 본체가 본래 없을 때에, 사물은 본체를 갖지 않는다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바달다란 사람이 집에 없는데도 누군가가 제바달다는 집에 있다고 한다고 하자. 그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에 대해, 없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이 경우의 없다고 하는 말은 제바달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제바달다가 집에 없는 것을 알릴 뿐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에 본체는 없다 하는 말도, 사물에 본체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에 본체가 없는 것을 알릴 뿐이다.
그 경우에 그대가 본체가 없을 때에 본체가 없다고 하는 표현을 왜 하는 건가. 만일 본체가 참으로 없는 것이라면 본체가 없는 것은 말이 없어도 알게 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그리고 부정하는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지랭이를 물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그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잘못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비롯해서 네 시송을 그대는 말했는데, 그것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하련다.
그대는 또 아지랭이의 비유에 대해 크게 의론을 전개했으나, 그것에 대해서도 이 비유가 어떻게 해서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결론을 들으라.
그대가 아지랭이의 비유에 대해 말한 큰 의론에 관해서도, 어떻게 해서 이 비유가 타당하게 되는지 그 결론을 들어 주게.
만일 그 오해가 본체로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니다. 한편 그 오해가 다른 것에 의해 생긴다면 그것이 공성이 아닌가.
만일 아지랭이를 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해가 본체로서 있다면,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이해가 아지랭이에 의해, 잘못된 시각과 주의가 옳지 못한 것에 의해 생겼다고 하면, 다른 것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다른 것에 의해 생긴 것인만큼, 본체로서는 공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이다.
또, 그리고 만일 오해가 본체로서 있다면, 누가 그 오해를 없앨 수 있겠는가. 나머지 것에 대해서도 이 도리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난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지랭이를 물이라고 하는 오해가 본체로서 있다면, 누가 대관절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불의 뜨거움, 물의 축축함, 허공의 비저항성은 없앨 수 있다고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본체라고 하는 것은 만일 있다고 한다면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오해가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해는 본체가 없는 것이다.
이해되는 것 등의 나머지 다섯 가지에 대해서도, 이 이론의 과정이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대가 여섯 가지가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은 공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그대가
그대의 의론에는 근거가 없다. 본체가 부정되고 마는 데 어떻게 근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의론의 내용에 근거가 없을 때에는 그것이 증명될 리가 없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말하련다.
근거가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앞에서 아지랭이의 비유를 물리치는 도리를 말하는 가운데서 대답하고 있다. 사정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앞에 행한 고찰에 의해, 근거가 없다고 하는 그대의 항의도 비판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여섯 가지 것을 부정하기 위해, 앞에서 이유로 말한 고찰과 같은 것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부정하는 것이 앞에 있고, 부정되는 것이 뒤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부정하는 것이 뒤이고 부정되는 것이 앞에 있어도, 둘이 동시에 있어도, 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본체는 어디까지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말하겠다.
세 가지의 시간적 관계에 대한 논거는 이미 대답이 되어 있다. 사정이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가지 시간적 관계를 부정하는 논거는 공성을 논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것이다.
세 가지 시간적 관계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는 그대의 논거는, 이미 비판이 끝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째선가, 그 자체가 확실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말한 대로 부정하는 것은 세 가지 시간적 관계에서 있을 수 없고, 부정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부정하는 것과 부정되는 것이 없을 때에, 그대가 부정은 부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 가지 시간적 관계의 부정을 말하는 이 논거야말로 공성을 논하는 우리에게 적합한 것이다. 우리야말로 모든 것의 본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나는 무엇인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또 부정되는 것이 무엇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정한다고 하는 이 항의는 그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라고 이미 대답한 것이다.
혹은 그대는 생각할 것이다. 부정은 세 가지 시간의 어느 것에 있어서도 성립한다. 부정된 것에 대해서 앞에 있는 부정적 근거도 있을 수 있고, 뒤에 있는 근거도, 동시에 있는 근거도 있는 것이다. 그 중 앞에 있는 근거란 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뒤에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제자와 같은 것이고, 동시적인 것은 조명에 대한 등불과 같은 경우다라고.
이것에 대해 우리는 말하겠다.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같은 순서에 대해, 앞에서 지적된 잘못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부정이 참으로 있는 것을 승인한 셈이 되고, 그대는 자기의 주장과 모순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본체의 부정도 성립하게 된다.
이 공성을 깨닫게 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공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어느 사람이 이 공성을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람은 모든 경우에 세간, 출세간의 사물을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성을 이해하는 사람은 다른 것에 의한 생기가 이해된다. 다른 것에 의한 생기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네 가지 높은 진리가 이해된다. 네 가지 높은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출가도의 결과가 이해되고 모든 훌륭한 것이 달성된다. 모든 훌륭한 것이 달성된 사람에게는, 불타와 교법과 승단이라는 세 가지 보배가 이해된다. 다른 것에 의한 생기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덕과 덕의 원인과 부덕의 결과가 이해된다. 덕 부덕과 덕 부덕의 원인과 덕 부덕의 결과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번뇌, 번뇌의 원인, 번뇌 자체가 이해된다.
지금까지 든 이들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생존과 나쁜 생존의 구별, 좋은 생존과 나쁜 생존에의 윤회, 좋은 생존과 나쁜 생존으로 인도하는 길, 좋은 생존과 나쁜 생존을 초월하는 방법, 다시 시간의 모든 상식과 관행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스스로 온갖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로는 겨우 조금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예배의 시송을 든다.
공성과 다른 것에 의하는 생기와 중도는 뜻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 비할 바 없는 사람을 나는 예배한다.
이것은 아차리야 나가르주나 보살의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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