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 돈오의 취지는 선과 지혜의 문제로 끝난다. 일찍이 계율 선정 지혜라는 삼학으로 짜여져 있는 불타의 가르침을 혜능까지의 불교 역사에서는 충실히 지켜져 왔다. 계율에 의해 선정을 얻고, 선정에 의해 지혜를 얻는 것으로, 그 같은 순서를 떠나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혜능은 삼학의 순서를 무시하고 새롭게 그것들을 하나로 보았다. 선이란 곧 반야의 지혜로서 단순히 삼학의 하나는 아니다. 이제까지의 불교는 마음이 일으킨 병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대증요법에 그치고 있었다. 혜능은, 사람은 누구나가 다 본래 건강해서 아무것도 모자라는 데가 없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참다운 삼학이다. 그는 여기서 삼학 일행삼매라는 전통사상을, 그것들이 생겨나는 근원에서부터 다시 파악해 보이고 있다. 사상에 의해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혜능대사가 다시 말했다.
"선지식들이여,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이 본래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여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 모름지기 큰 선 지식의 가르침을 구하여 견성 해야만 된다.
선지식들이여, 깨닫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게 될 것이다.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선정과 지혜로서 근본을 삼으니 첫째로 잘못 생각하고 선정과 지혜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선정과 지혜는 한몸으로 둘이 아니다. 선정은 곧 지혜의 주체요, 지혜는 곧 선정의 작용이다. 곧 지혜가 나타날 때는 선정은 지혜 안에 있고, 또한 선정이 나타날 때는 지혜가 선정 안에 있다.
선지식들이여, 이것은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함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조심하여, 선정에서 지혜가 나온다라거나, 지혜에서 선정이 나온다라고 생각하여 선정과 지혜를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법에 두 가지 모양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지혜와 선정을 함께 함이 아니다. 마음과 말이 다 착하고 안과 밖이 하나가 되면, 선정과 지혜는 곧 함께 함이 된다.
스스로 깨달아 닦고 행함은 말로 다투는 데 있지 않으며, 만일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 이기고 지는 마음을 끊지 못하고, 도리어 법아를 낳아, 네 가지 모양을 버리지 못한다.
일행삼매라는 것은, 일체의 시간을 통해 행주좌와에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에 이르기를 '곧은 마음이 바로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바로 정토이다' 라고 했다.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만 일행삼매를 말하여, 곧은 마음을 행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 제자가 아니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행삼매라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사로잡혀, 곧은 마음으로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망념을 없애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일행삼매라고 하나, 이렇게 되면 이 가르침은 생각이 없는 나무나 돌로 되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된다.
도는 마땅히 유통해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법은 곧 유통하게 되지만, 머물러 있으면 곧 얽매이게 된다.
만일 앉아 움직이지 않음이 옳은 것이라면, 사리불이 숲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꾸짖은, 유마힐이 옳지 않은 것이 된다.
선지식들이여, 또 어떤 분이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살피고 마음의 깨끗함을 찾아 내어,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로써 공부를 쌓도록 하고 있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미치광이가 되니, 이런 사람은 수백에 이른다. 이같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은 원래 크게 잘못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지식들이여, 선정과 지혜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등불과 그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곧 빛의 주체요, 빛은 곧 등불의 작용이니,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니, 또한 내가 말한 선정과 지혜의 가르침도 또 이와 같다.
선지식들이여, 가르침에는 단번에 깨달음과 점차로 깨달음의 구별이 없다.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한 사람이면 점차로 이끌어 주어야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빨리 닦는다. 스스로의 본심을 알면 이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니, 깨닫고 나면 곧 원래부터 차별은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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